대구부(大丘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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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대구부(大丘府)는 신라의 달구화현(達句火縣)에서 기원했으며, 신라 경덕왕 때 대구현(大丘縣)이 되어 수창군(壽昌郡: 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일원)의 영현(領縣)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대구현이라 하였으며, 경산부(京山府: 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일원)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1143년(인종 21)에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조선 건국 후인 1419년(세종 1)에 대구현은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되었고, 1466년(세조 12)에는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 즉 대구부가 되었다. 1596년(선조 29)에 최초로 대구에 경상도감영(慶尙道監營)이 들어선 이래, 1601년(선조 31)부터 조선후기 내내 경상도감영이 위치하였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대구도호부사를 겸임하였다. 이후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대구부는 대구군이 되어 23부의 하나인 대구관찰사부 즉 대구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대구관찰사부는 폐지되고 대구군은 다시 대구부가 되어 경상북도의 도청 소재지로 기능하였다. 조선시대에 대구부의 읍치는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지역에 위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대구부는 원래 신라의 달구화현으로, 신라 경덕왕 때 대구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대구현이라 불렸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산부의 속현이 되었다. 하지만 1143년에 현령이 파견되어 경산부의 관할로부터 분리·독립하였고, 화원(花園)·하빈(河濱) 2개 현이 대구현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그대로 대구현이라 하였으나, 하빈현이 대구에 병합되고 인접한 수성(壽城)·해안(解顔: 현 대구광역시 동구 일원) 2개 고을마저 1414년(태종 14)에 대구에 편입되면서 대구의 인구가 늘어났다. 이에 1419년에 대구군으로 승격하고 지군사(知郡事)를 임명하였다(『세종실록』 1년 5월 26일). 1466년에는 대구군을 대구도호부로 다시 승격하고 도호부사를 파견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조직 및 역할

대구부는 신라 경덕왕 때 수창군의 영현인 대구현으로 편제되어 신라 9주 중 양주(良州)의 관할하에 두었다. 당시 대구현에는 지방관으로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대구현은 경산부(京山府)의 속현으로 편제되었다가 고려중기 이래로 현령관이 파견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그대로 현령이 임명되었지만, 1419년(세종 1)에 대구군으로 승격하여 지군사를 파견하였고, 1466년(세조 12)부터는 대구도호부가 되어 도호부사를 파견하였다. 고려시대에 대구에는 현령이 근무하는 외관청(外官廳)과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대구부사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대구부에 종3품의 도호부사와 종6품의 교수(敎授)가 파견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대구부에는 2품의 문관(文官)이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며, 대구부사를 겸임하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 밖에 종5품의 음관(蔭官)인 판관(判官)과 정3품의 무관(武官)인 영장(營將)이 임명되었으며, 판관의 예하에는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40명, 인리(人吏) 96명, 지인(知印) 40명, 사령(使令) 18명, 군뢰(軍牢) 13명, 관노(官奴) 42명, 관비(官婢) 40명이 편성되었고, 영장 예하에는 군관 171명, 진무(鎭撫) 30명, 지인 22명, 사령 25명, 군뢰 50명이 편성되었다. 19세기의 자료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대구에는 종3품의 도호부사가 임명되나 관찰사가 겸임하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대구의 호수가 436호, 인구는 1,329명으로 나와 있으며, 대구에 병합되었던 수성·하빈·해안 세 속현의 호수는 각각 264호·351호·198호, 인구는 644명·1,249명·1,203명으로 기록되었다. 『여지도서』에는 1759년(영조 35)에 대구부의 호수가 12,752호, 인구는 59,614명으로, 그중 남자가 24,913명이고 여자가 34,701명이라고 기재되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자료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대구에 34개의 면과 253개의 리가 기재되었으며, 호수는 13,413호, 인구는 61,477명으로, 남자는 26,691명, 여자는 34,786명이었다. 1910년(순종 4)의 조사 내용인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따르면 대구의 호수는 21,382호이고, 인구는 89,063명으로, 그중 남자가 48,431명, 여자가 40,632명이라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 대구부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대구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략적 중요도가 매우 높아졌다. 1596년에 처음으로 대구에 경상도감영을 설치하였으며, 1599년(선조 32)에 감영이 안동부로 잠시 이전되었지만 1601년에 다시 대구로 돌아온 후 조선후기 내내 대구에 경상도감영이 위치하였다. 이때부터 경상도관찰사가 대구도호부사를 겸하였고, 별도로 판관이 임명되어 관찰사의 업무를 보조하였다. 1676년(숙종 2)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대구부사를 겸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가, 1684년(숙종 10)에 다시 부사를 겸하도록 하였으며, 1685년(숙종 11)에는 성주(星州)의 화원, 밀양(密陽)의 풍각(豐角) 등을 대구에 소속시켰다. 1751년(영조 27)에 경상도관찰사가 대구부사를 겸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가 1758년(영조 34)에 다시 부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대구부는 대구군이 되어 대구관찰사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1896년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다시 대구부가 되고 경상북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10년에 대구부는 다시 대구군이 되었으며,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도 대구군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