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목(羅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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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나주시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나주목(羅州牧)은 고려 983년(고려 성종 2)에 설치된 전국 12목(牧) 가운데 하나이다. 995년(고려 성종 14)에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두고 진해군(鎭海軍)이라 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9년(태종 9)에 나주목이 관할해 오던 8현과 2향 1소 6부곡이 나주목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나주목은 1645년(인조 23), 1655년(효종 6), 1728년(영조 4)에 읍격(邑格)이 강등되어 읍호(邑號)가 금성현(錦城縣)으로 바뀌고 현감(縣監)이 파견된 적이 있었다. 이때 전라도 명칭은 전남도(全南道)나 전광도(全光道)로 변경되기도 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나주목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나주목은 983년에 전국 12목 중 하나로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전라도 계수관(界首官)이었는데, 1393년(태조 2)에 나주가 완산(현: 전주)·광주와 함께 전라도 계수관으로 정해졌다(『태조실록』 2년 11월 12일).

나주목은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속군(屬郡)과 속현(屬縣)을 거느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나주목이 관할해 오던 8현과 2향 1소 6부곡이 나주목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8현은 영산(榮山)·압해(押海)·여황(艅艎)·회진(會津)·안로(安老)·복룡(伏龍)·반남(潘南)·장산(長山)이며, 2향은 종의(從義)와 손리(孫利)이다. 1소는 수타(水墮)이며, 6부곡은 거평(居平)·임성(任城)·군산(群山)·극포(極浦)·금마(金磨)·평구(平丘)이다.

조직 및 역할

나주목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정3품 목사(牧使) 외에 종5품 판관(判官)과 종6품 교수(敎授)를 1인씩 둔다.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나중에는 대부분 폐지되었는데, 나주목은 광해군 이전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광해군일기』 즉위년 9월 21일). 조선초기에는 각 도의 여러 목에 교수도 1인씩 두었다가 뒤에 폐지하였다.

나주목은 정3품의 목사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목사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목사를 도와 통치 실무를 담당한 군관과 향리와 관노비 등 관속(官屬)이 있었다.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에는 좌수 1, 별감 3, 군관 50, 아전 73, 지인(知印) 29, 사령(使令) 41, 관노 33, 관비 35, 총 265로 되어 있다. 19세기 후반의 『호남읍지(나주목읍지)』에는 그것이 좌수 1, 별감 3, 군관 50, 아전 80, 기생 22, 사령 41, 관노 32, 관비 17, 총 246으로 적혀 있다.

나주목사는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임하였는데, 이는 『경국대전』에서 종3품 병마첨절제사 4원을 전라도에 두고 나주목사·남원부사·순천부사·장흥부사가 겸임하게 한 규정에 따른 것이다. 그 밖에 종4품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나주진관(羅州鎭管)의 광주·영암·영광에,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나주진(羅州鎭)과 나주진관의 광주·함평·고창·장성·진원·무장·남평·무안에 각각 1원씩 두도록 정해졌다.

나주목에는 대체로 문관이 임용되었다. 수령의 임기는 태조와 태종 대에는 30개월, 세종에서 단종 대에는 60개월, 세조대에는 다시 30개월이었다. 그것이 『경국대전』에 와서 1,800일, 약 5년으로 규정되었는데, 가족을 데려가지 않는 미솔권(未率眷) 수령은 그 절반인 900일이었다.

변천

나주목은 세 차례 읍격의 승강에 따라 읍호의 변화를 겪었다. 첫 번째는 1645년(인조 23)이었다. 나주의 주리(州吏)양한룡(梁漢龍) 등이 목사(牧使)이갱생(李更生)을 칼로 찔러 중상(重傷)을 입인 일로 나주목이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도의 명칭도 전남도로 바뀌었다(『인조실록』 23년 7월 11일). 10년째 되던 1654년(효종 5)에는 나주목으로 다시 승격되었다. 두 번째는 1655년(효종 6)에 나주에서 전패(殿牌)를 파손한 일로 다시 읍호를 낮추어서 금성현이 되었으며, 1664년(현종 5)에 다시 나주목으로 승격되었다(『효종실록』 6년 1월 17일) (『현종실록』 5년 1월 9일). 세 번째는 1728년(영조 4)이었다.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역적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나주의 읍호를 낮추어 금성현으로 했다. 이 일로 말미암아 1735년(영조 11)에는 전라도 명칭이 전광도로 바뀌었으며, 1738년(영조 14)에 다시 전라도로 회복되었다. 숭대(崇大)와 만치(晩致) 등 역적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읍호를 낮추었던 것인데, 이미 10년의 시한을 채웠기 때문에 원래대로 되돌린 것이다(『영조실록』 11년 5월 1일) (『영조실록』 14년 1월 11일).

1455년(세조 1)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나주를 비롯하여 광주·남평·능성·영암을 전라도 나주도(羅州道)의 중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세조 3)에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나주도 그중 하나이다. 나주진에는 무장·고창·영광·함평·무안·영암·남평이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기록되었다. 충좌위의 우부(右部)에는 나주진관의 군사가 편성되었다.

1654년(효종 5)에 전국의 군사제도가 개편되었다. 이때 전라도는 중영 전주·우영 나주·좌영 남원·전영 순천·후영 여산에 5영(營)을 두고 각 군현을 배속시켰다. 조선후기에는 나주거진이 전라우영(全羅右營)으로 바뀌었다. 우영의 속읍은 나주·광주·능주·영암·영광·화순·남평·무안·함평·무장 10곳이며, 우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52초, 표하군(標下軍) 210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65명으로 되어 있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나주목에 포군 10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 체제 폐지와 함께 나주목이 폐지되고 23부가 시행되면서 나주부가 되었다. 나주부 밑에는 나주군을 비롯한 16개 군이 있었다. 같은 해에 감영과 안무영 등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나주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호남읍지(湖南邑誌)』
  • 「나주목여지승각(羅州牧輿地勝覺)」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나주시지』, 나주시지편찬위원회, 2014.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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