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림당(東林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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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말기에 결성된 학파이자 붕당.

개설

동림당(東林黨) 혹은 동림파(東林派)는 명나라 말기인 신종(神宗)·희종(熹宗)대의 학파·당파로서, 고헌성(顧憲成) 등의 사대부들이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정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림당은 신종 초기 일시적인 주도권을 잡았으나, 환관 위충현(魏忠賢)이 중심이었던 된 엄당(奄黨)의 탄압으로 권력을 잃었다. 이후 강남 지역 소장파 신사(紳士)들을 중심으로 한 복사(複社) 운동(1629~1652년)으로 계승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582년 장거정(張居正)이 죽자 그의 황제 중심 중앙집권 강화책에 반대하던 관료계는 파당을 형성하고 당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내각파와 반내각파로 분열하였는데, 주요 쟁점은 국본(國本) 문제 즉 황태자 책봉 문제와 환관 파견을 통한 관세·상세 징수 문제였다.

반내각파의 일원이었던 이부(吏部) 낭중(郎中)고헌성(顧憲成)은 내각파와 대립 끝에 1594년 사직하였다. 일반적으로 동림당의 형성은 이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파악한다. 고향인 강소성(江蘇省) 상주부(常州府) 무석(無錫)으로 귀향한 고헌성은 동생인 고윤성(顧允成)·고반룡(高攀龍) 등과 함께 1604년 동림서원을 중건하고 중앙정치에 대한 투쟁을 지속하였다. 동림당은 동림서원 출신뿐만 아니라 그들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는 관료 및 사류(士類)를 아우르는 명칭이었다. 또한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강남 지방 신사들의 중앙정치에 대한 비판 그룹이 형성되었다.

변천

신종 말기 명조의 중앙정계에는 선당(宣黨)·곤당(崑黨)·절당(浙黨)·제당(齊黨)·초당(楚黨) 등 여러 붕당이 있었는데, 이들은 반동림 세력으로 연합하여 동림당의 득세를 막았다. 신종 말기에서 희종대까지 명대 정치의 주요 당쟁 사안은 삼안(三案)이었다. 곧, 1615년 몽둥이를 든 괴인이 태자궁에 침입한 정격안(梃擊案) 사건, 1620년 광종이 붉은 알약을 먹고 즉위 한 달 만에 급서한 홍환안(紅丸案) 사건, 같은 해 희종의 유모 이씨를 별궁으로 옮겨 정치 개입을 막은 이궁안(移宮案) 사건 등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정쟁이 격화되었다. 1622년 동림파 관료들은 삼안을 주모하였다는 이유로 반동림파 세력을 탄핵하고 세력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반동림파 세력은 환관 위충현을 중심으로 엄당을 결성하여 1625부터 1626년까지 동림당의 핵심 인물이었던 양련(楊漣)·좌광두(左光斗)·주기원(周起元) 등을 죽이고, 동림서원을 폐쇄하여 동림당 지도자들을 소멸시켰다.

그러나 1628년 청 의종(숭정제)의 즉위로 위충현이 쫓겨나고 엄당이 제거되었으며 동림당은 복권되었다. 이후 동림당은 정치 세력으로서 권력을 회복하지는 못하였지만, 명대 지방 문인들의 문학·정치 결사체였던 복사운동으로 계승되어 큰 영향을 주었다.

동림당에 대한 조선인들의 인식은 조선 내 붕당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한 17세기 이후 주로 나타났다. 예컨대 영조는 명대의 동림당 등을 열거하며 당습(黨習)의 폐단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으며(『영조실록』 13년 8월 28일), 영조의 지원을 받았던 탕평파 원경하(元景夏)는 붕당폐해론의 입장에서 동림당을 비판하였다(『영조실록』 18년 9월 12일)(『영조실록』 24년 12월 25일). 반면 노론 낙론계의 도학적 붕당론을 주장하였던 임성주(任聖周)·홍계희(洪啓禧) 등은 동림당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조선 내 정치 세력의 붕당정치에 대한 긍정·부정적 관점에 따라 동림당에 대한 평가가 대비되었음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 편, 『강좌 중국사. 4: 제국질서의 완성』, 지식산업사, 1989.
  • 김문용, 「명말 동림학과 조선후기 유학의 반응」, 『동양고전학회』 39, 2010.
  • 김종박, 「명대 동림당쟁과 그 사회배경」, 『동양사학연구』 6, 1981.
  • 조영록, 「명대 동림파의 연구-고반룡의 생애와 사상을 中으로」, 『역사학보』 29,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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