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동군(碧潼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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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벽동군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벽동군(碧潼郡)은 조선 태종 때 여진족을 몰아내고 군으로 설립한 후에 그대로 유지되다가 1895년(고종 32)에 의주부 벽동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벽동군은 압록강을 끼고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국방상 요충지로 인식되면서 창성, 위원, 이산, 강계, 의주, 삭주와 함께 강변 7읍으로 불렸다. 고려말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삼남지방의 백성을 옮겨 정착시킨 후 태종 때 군으로 설립하였고, 조선후기까지 유지되다가 1895년에 의주부 벽동군이 되었다. 다른 이름으로 설성(雪城)이라고도 불렀다.

조직 및 역할

벽동군은 조선 태종 때 종4품의 지군사(知郡事)를 두어 다스리다가 1466년(세조 12)에 관제 개편에 따라 지군사를 종4품의 군수(郡守)로 바꾸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군수와 훈도(訓導) 각 1인을 두었으나 이후에 훈도를 폐지하였다. 군수는 관찰사의 지휘를 받으며 한 군의 행정·사법·군사권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였고, 종9품의 훈도는 교관으로 지방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삭주도우익병마(朔州道右翼兵馬)를 겸하다가 이후에는 국방상 중요한 곳이라는 인식하에 독진(獨鎭)이 되었다.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벽동군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2명, 병방군관 3명, 별장 2명, 천총 3명, 파총 3명, 기고관 6명, 초관 4명, 고감 3명, 창감 13명, 아전 42명, 통인(通引) 22명, 사령 10명, 군뢰 17명, 관노 97명, 관비 76명이 있었다.

변천

벽동군은 여진족이 살던 곳으로 본래 임토(林土), 벽단(碧團)이라 불렸다. 고려시대 1357년(고려 공민왕 6)에 이성만호(泥城萬戶)김진(金進)을 보내 여진족을 몰아내고 임토를 음동(陰潼)으로 고치고 벽단에 예속시켰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 1403년(태종 3)에 벽단을 벽동으로 고치고 군을 설치하여 지군사를 두었다(『태종실록』 3년 6월 29일). 1466년(세조 12)에 관제 개편을 하면서 지군사를 군수로 바꾸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의주부 벽동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이존희, 「조선초기의 수령제도」, 『역사학보』30·31 합집, 1982.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