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의현(文義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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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문의면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문의현(文義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청주목에 속한 현이다. 15세기에 가호가 353호, 인구가 1,871명이었다. 군정 중에는 다른 지역에는 드문 감영 소속 군정이 50명이나 되고, 진군(鎭軍) 124명, 선군(船軍) 26명, 시위군(侍衛軍) 18명이었다. 토지는 2,754결인데, 이 가운데 논은 3/9 정도였다.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청주에 합쳐져 문의면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연산군(燕山郡)으로 개명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이 이름을 계속 사용하면서 청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1172년(신라 명종 2)에 감무를 파견하였다. 1259년(신라 고종 46)에 위사공신 박희실(朴希實)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문의현으로 개명하고 현령을 파견하였다. 충렬왕 때 잠시 지금의 임천 지역인 가림(嘉林)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계속 현령을 파견하는 지역으로 유지되었다. 문의현은 규모가 작아서 독립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산간 지역이 많아 토질이 좋지 않고, 특산물도 대개가 임산물·약재·동물가죽이었다. 그러나 지리적 요인과 충청도 감영과 가깝다는 이유로 현을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5품 현령이다. 조선후기에는 음서 출신자를 수령으로 임명하는 지역이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관속으로는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0명, 아전 20명, 지인 16명, 사령 15명, 관노 11명, 관비 17명이 있었다.

변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의현이 침탈을 많이 받아 청주에 합쳐졌다가 다시 현으로 복구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대부분 방위명을 딴 7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8세기에 호구가 2,778호, 남자 4,450명, 여자 4,206명이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토지는 밭이 2,048결, 논이 947결이었다. 1900년(고종 37)의 『문의군양안(文義郡量案)』에는 7개 면에 가호가 4,459호, 토지가 2,230결이었다. 1895년(고종 32)의 23부제 개혁 때 공주부 소속의 문의군으로 승격되었다가(『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914년에 청주에 합쳐져 문의면이 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문의군양안(文義郡量案)』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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