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현봉(德峴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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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영해부(寧海府)에서 관리하던 봉수로서, 동해안의 적변을 중앙에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용하였음.

개설

조선후기에 영해부(寧海府)에서 관리하던 두 개의 봉수 중 하나이다. 단기적으로 운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설치 시기와 대응봉수 등은 상세히 알 수 없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후기에 대소산봉수와 더불어 영해부에 속한 두 개의 봉수 중 하나였다. 동해안에 발생한 적변을 중앙에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덕현봉은 영조와 순조대 주로 언급되었다. 1746년(영조 22) 영해부사(寧海府使)이징하(李徵夏)가 영양과 덕현은 예전부터 봉수의 길이 매우 순탄했는데, 중간에 광산(廣山)으로 이설하면서 산세가 험하고 외져서 지키는 자가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있으니, 광산봉수를 폐지하고 다시 덕현으로 옮겨 달라고 상소하였다(『영조실록』 22년 12월 6일). 이에 조정에서는 상소를 비변사에 보내어 도신(道臣)과 수신(帥臣)들이 지형을 살펴본 뒤 계문하라고 하였다. 또한 1811년(순조 11) 비변사의 회계에서, 영해부에는 대소산과 덕현봉에 봉수가 있었는데, 여기에 필요한 봉군이 200명이나 되므로 군액(軍額)을 채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덕현봉을 영양현(英陽縣)에 소속시켜 100명의 봉군은 그곳에서 충정(充定)하도록 논의하였다. 이때 비변사가 반대하여 덕현봉수의 영양 소속은 무산되었다(『순조실록』 11년 3월 30일).

조직 및 역할

영조대에 광산봉수의 대안으로 이설이 건의되었다. 이후 순조대에는 봉군 100명이 소속되어 있었으나, 군액을 채우기가 어려워 일시 혁파가 논의되기도 하였다.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