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위원(警衛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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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황궁 내외의 경비·수위·규찰·체포 등의 업무를 수행한 궁내부 산하 관서.

개설

경위원은 각종 정치 사찰과 정보 기구로서의 기능을 경찰 행정에서 특화시킨 단일 기구였다. 대한제국의 정치 구조는 궁내부와 의정부가 국정을 운영하는 이원적인 체계였다. 그런데 궁내부가 의정부의 업무를 점차 흡수하면서 국정을 전담해 가는 형태로 변하였다. 황제권 강화와 함께 경찰 제도도 변하였다. 경부의 조직과 기능이 경위원과 경무청으로 분화되었는데 이것도 궁내부의 강화와 연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종은 경무청을 경부로 승격시킨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경부의 기능을 약화시킬 것을 지시했다. 고종은 1901년 3월 15일 “경부의 신설은 사무를 확장하기 위함인데, 아직 실효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폐단만 더하니 이제부터 관제를 일체 전 경무청에 의하여 시행하고 장정을 의논하라”고 정부에 명했다. 그 후 경부 관제가 경무청 관제로 개정·반포된 것은 1902년 2월 18일이었다.

경부를 이전의 경무청 관제로 복구한 데는 별도의 경찰 기구 창설이 전제되었다. 고종은 1901년 자신의 측근 김영준의 모반 사건으로 인하여 별도의 경찰 기구 창설을 추진했다. 1901년 11월 궁내부 산하에 설치된 궁내경무서를 독립시켜 경위원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수순을 거친 후에 경부 관제는 이전의 경무청 관제로 하향 조정되었다. 이로써 경찰 기구는 황제 직속의 경위원과 정부 산하 행정 관청인 경무청의 이원적 체제로 운영되었다.

조직 및 역할

1901년 11월 설치된 경위원 관제와 1902년 2월 설치된 경무청 관제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무청은 국내 일체의 경찰 사무를 관장했고, 경위원은 황궁 안팎의 수비와 규찰, 체포 업무를 전담했다. 둘째, 경무청은 각 관찰부와 변경(邊境) 지역에 경무서를 설립하는 것을 포함하여 지방의 경찰 사무 일체를 총괄했고, 경위원은 개항장(開港場)의 경무서를 담당했다. 셋째, 경무청의 으뜸 벼슬인 경무사(警務使)가 칙임 문관(文官) 중에서 임용된 반면, 경위원의 최고 직책인 총관(總管)은 무관(武官)인 장령관(將領官)으로 임명되었다.

경무청은 일반 경찰 업무를 관장하는 행정 관청의 위상이었다. 반면, 경위원은 황궁 수비, 각종 사찰과 정보 수집, 국법 위반자에 대한 수사와 체포 등의 업무를 담당하여 일본의 특수 경찰 기관과 같은 성격을 가졌다. 경위원 총관직에 문관이 아닌 장령관급(將領官給) 무관을 기용한 점은 경위원이 일반 경찰 행정 기관이 아닌 특수 경찰 기관임을 보여 준다.

경위원은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초법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경위원에서는 정치적 동향에 대응하면서 체제 안정에 반하는 일체의 정치 행위를 규제하고 금지했다. 경위원은 1902년 5월 유길준과 일본 유학생의 정변 모의를 발각하자 국내 관련자 이상재, 이원긍, 유성준 등을 모두 체포했다. 1902년 12월에는 이용익과 윤용선 등을 암살하려는 모의를 발각하고 박희병과 이선재 등을 체포했다.

경위원은 정부의 정책이나 정부 관료에 대한 비판 등 상소를 포함한 각종 언론 행위를 탄압했다. 경위원은 황해도 지방의 이석무 등이 정부 관료를 비판한 상소를 올리자 무고죄로 체포했다. 전 의관 송수만은 일본 제일은행이 발행한 은행권[日本第一銀行券]과 청국 상인 동순태가 발행한 어음 동순태표(同順泰票)를 사용하지 말자는 글을 종로에 내걸었다가 체포되었다. 경위원은 궁정과 정부 대신들의 저택을 감시하기도 했다. 경위원은 신분을 막론하고 체포·구금하는 무소불능의 권한을 행사했다.

대한제국의 재정 확보 정책에도 경위원이 동원되었다. 경위원은 개항장 경무서의 설립과 활동을 관할하여, 개항장 객주회사에 대한 봉건적 수취 체계를 재편하고 각 포구에서 잡세 징수를 강화했다. 회사를 설치하고 영업과 수세 활동을 강화하기도 했다. 가사리회사(加沙里會社) 세칙 장정을 제정하여 목포에 본사를 두고 바닷가의 각 군에 대리점을 설치해 해조류인 풀가사리[布海苔]를 모두 회사로 납입하게 만들었다.

변천

대한제국은 1903년 경위학교를 설치했고 경위원은 경위 장정 교육을 통해 경찰 인원을 충원했다. 경위원은 초법적인 권한 행사와 그에 따른 폐해, 1901년 11월 경위원 설치 때부터 1904년 2월까지 경위원 총관직을 독점한 이근택(李根澤)의 전횡 등으로 당시 집권층 내부의 반발을 초래했다. 1902년 단행된 개각으로 신정부를 구성한 심상훈과 신기선 등도 경위원 폐지를 건의했다. 경위원 총관을 역임한 인물은 이근택, 김정근(金禎根), 양성환(梁性煥)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차선혜, 「대한제국기 경찰제도의 변화와 성격」, 『역사와현실』19,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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