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환인(逃還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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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에게 납치되거나 왜란과 양차의 호란 때 포로로 끌려갔던 피로인 중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

개설

도환인(逃還人)은 조선시대 세 차례에 걸쳐 발생하였다. 첫째, 명종대 왜구가 삼남 지역을 노략하면서 납치한 백성이 탈출한 것(『명종실록』 11년 4월 27일), 둘째, 임진·정유왜란기 왜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자들이 탈출한 것, 셋째, 정묘·병자호란기 청군이 잡아간 인물들이 탈출해 온 것이다. 따라서 도환인은 외적의 침입 때 납치되었던 국내인, 즉 피랍인이 탈출해 온 것을 말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도환인의 발생이 외적의 침입에 의한 결과이므로 중국과 일본의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라 야기되었다. 도환인은 피랍인, 포로들이었으므로 노역의 착취와 속환금을 받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변천

도환인의 발생 배경 중 호란의 경우를 보면 청나라 내부의 문제가 주요 요인이었다. 예를 들어, 청은 누르하치[奴兒哈赫]가 만주를 차지한 이후 식량 문제로 줄곧 위협을 받았다. 통합한 여러 유목 민족을 먹여 살릴 농토와 식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나아가 당시 동아시아에 불어닥친 이상 기온에 따른 식량 생산의 감소와 대명(對明) 교역의 단절로 인한 경제적 위기가 찾아들었다. 이에 청은 영구적인 자급자족 대책으로 농경 사회로의 변화를 도모했다. 청은 농경에 필요한 인력 수급이 필요해, 전쟁을 통해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려는 사회경제적 목적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다수의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청군은 정묘호란 시기에 많은 수의 포로를 잡아갔다. 정묘호란의 현장인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인이 주로 끌려갔다.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해 항전하고 있는 동안에 경기 지역과 한강 이북 지역의 백성들이 청군에게 피살되거나 사로잡혔다. 사로잡힌 피로인(被擄人)들은 심양(瀋陽) 등지로 압송되었다. 청 태종으로서는 전공을 세운 장졸들에 대한 포상과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서 많은 포로가 필요했다.

그런데 전란이 끝난 직후부터 피로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줄을 지어 도망해 조선으로 되돌아오고, 청이 그들의 송환을 요구하면서 조·청 관계는 다시 긴장 국면에 접어들었다. 조선에서는 도환인 송환 문제가 큰 정치사회적 현안이 되었다.

성하지맹을 맺을 당시 청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문제 삼지 않지만, 압록강을 건넌 뒤 조선으로 도망치는 자는 조선 조정이 다시 붙잡아 보내야 한다."는 약조를 조선 조정에 강요했다. 약조대로 도환인을 쇄환할 경우, 그들은 청에서 발뒤꿈치를 절단당하는 참혹한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1640년(인조 18) 말부터 도환인을 쇄환하라는 청의 요구는 더욱 강경해졌고, 조선 조정은 이를 거절할 힘이 없었다. 이 때문에 조선 팔도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그러나 성하지맹을 맺은 후에 청의 강력한 내정 간섭을 받고 있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청의 요구에 따라 도환인을 송환하는 것 외에 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현재 전체 도환인의 수와 다시 송환된 자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청이 도환인 송환 문제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이에 대응할 힘이 없었던 조선 상황을 감안할 때, 도환인 대부분이 송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 김종원, 「초기 조·청관계에 대한 일고찰」, 『역사학보』71, 1976.
  • 남은경, 「병자호란과 그 후의 기록 ‘심양장계(瀋陽狀啓)’」, 『한국문화연구』14, 2008.
  • 한명기, 「병자호란 패전의 정치적 파장」, 『동방학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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