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부(巨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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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 기원하여 1914년까지 현재 경상남도 거제시 지역에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거제도에는 신라시대에 처음으로 고을이 설치되었으며, 거제라는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사용되었다. 신라시대에는 거제군으로서 3개의 영현을 거느렸으며, 고려시대에는 거제현으로서 3개의 속현을 거느렸다. 고려말기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거창현의 가조 지역으로 임시로 옮겼다가, 1422년(세종 4)에 거제도로 돌아왔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거제현으로 불리다가, 1711년(숙종 37)에 거제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거제군이 되고, 1914년에 용남군과 통합되어 폐지되고 통영군에 속하였다. 1953년에 거제군이 부활되고, 1995년에 거제시로 승격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거제부(巨濟府) 즉 거제도호부(巨濟都護府)는 거제도에 위치하였다. 신라 문무왕 때 거제도에 처음으로 상군(裳郡)을 설치하였다가 경덕왕 때 거제군으로 개명하였다. 신라의 거제군은 9주 중 강주(康州)에 속하였으며, 아주현(鵝洲縣)·명진현(溟珍縣)·남수현(南垂縣)의 3개 영현을 거느렸다. 3개 영현 모두 거제도에 위치하였다. 신라의 거제군은 거제현이 되어 그대로 고려로 이어졌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현령(縣令)을 설치하였고, 신라 때 거제군에 소속되었던 아주현·명진현과 송변현(松邊縣)을 그대로 속현으로 거느렸다. 『고려사(高麗史)』에는 1271년(고려 원종 12)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거제현이 거창현(居昌縣)의 가조현(加祚縣) 땅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었으나 신뢰하기 어렵고, 실제로는 14세기 후반에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거창 가조 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말기에 왜구의 침략으로 거제도가 황폐하게 되었던 까닭에, 조선 건국 후에도 거제현 관아는 그대로 거창 가조 지역에 머물렀다. 1414년(태종 14)에 거제와 거창을 통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을 만들었다가 1415년(태종 15)에 다시 분리하여 거제현을 복구하였다. 왜구의 침략 위협이 줄어들자 거제도에 다시 주민들이 모여들게 되고 드디어 1422년(세종 4)에 거제현 관아가 거제도로 돌아왔다. 당시 거제현 관아가 들어선 곳은 수월평(水月平) 즉 오늘날 경상남도 거제시 수월동이다(『세종실록』 9년 1월 13일). 하지만 아주·명진·송변 3현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거제도 지역은 모두 거제현의 영역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라시대에 거제군에는 외관으로 태수(太守)가 파견되었다. 고려시대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거제현령을 두어 거제현과 속현 세 곳을 관할하였다. 중앙에서의 현령관 파견과 별도로 거제현에는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으며, 거제현령이 관리·감독하였다. 고려말기에 거제현이 거창 지역에 임시로 머물렀을 때에는 거제현의 조직 운영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1422년에 거제현 관아가 거제도로 돌아왔을 때에는 4품 이상의 지현사(知縣事)가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 이후에 현령으로 고쳤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거제현에는 종5품의 현령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거제현이 거제도호부로 승격하면서 거제현령 대신 종3품의 거제도호부사가 파견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도호부사(都護府使)는 종3품의 무관이 파견되었으며, 그 예하에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50명, 인리(人吏), 30명, 지인(知印) 15명, 사령(使令) 13명, 관노(官奴) 13명, 관비(官婢) 19명이 편제되었다.

조선전기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거제에 관방(關防)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이 있고, 수군만호가 파견된 영등포영(永登浦營)·옥포영(玉浦營)·조라포영(助羅浦營)·지세포영(知世浦營)이 있으며, 율포보(栗浦堡)에는 권관(權管)을 두었다. 이상의 군사 방어시설들은 조선후기의 기록인 『여지도서』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한편 거제부에는 관내의 유일한 역인 오양역(烏壤驛)이 운영되었으며, 오양역에도 방어를 위한 보루(堡壘) 시설이 1500년(연산군 6)에 설치되었다. 또한 거제도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칠천도목장(漆川島牧場)이 설치되었다.

변천

거제현은 1422년에 거제도로 돌아와 수월평에 관아 자리를 잡았으나, 4년 후인 1426년(세종 8)에 사등리(沙等里)로 옮겼다. 1451년(문종 1)에 다시 오늘날 거제시 고현동 거제시청 자리인 고정리로 이동하였다(『문종실록』 1년 5월 6일). 이후 1664년(현종 5)에 다시 관아를 오늘날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일대인 옛 명진현 서쪽 3리 지역으로 옮겼으며(『현종실록』 5년 윤6월 13일), 1711년에 거제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사등리와 고정리에 축조하였던 읍성의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동래부에 속하여 거제군이 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를 실시하면서 거제군은 경상남도 소속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용남군과 통합되어 거제군은 폐지되고 통영군에 속하게 되었다. 1953년에 거제군이 부활되고, 1995년에 장승포시와 통합하여 거제시가 출범하였다.

조선초기인 15세기에는 호수가 153호, 인구가 423명으로 기록되었으나, 18세기 후반에 발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읍내면(邑內面)·사등면(沙等面)·둔덕면(屯德面)·고현면(古縣面)·연초면(延草面)·청하면(淸河面)의 6개 면에 호수가 6,981호, 인구가 30,023명으로 나와 있으며, 20세기 초반 대한제국 말기에 조사된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는 동부면(東部面)·서부면(西部面)·둔덕면·사등면·연초면·하청면(河淸面)·장목면(長木面)·일운면(一運面)·이운면(二運面)·외포면(外浦面)의 10개 면에 호수가 8,152호, 인구가 41,713명으로 기록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호구총수(戶口總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