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시장(南大門市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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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부근에 개설된 상설시장.

개설

남대문시장은 남대문 안쪽 부근에 개설된 시장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남대문 주변에 2개의 시장이 있었다. 하나는 남대문 안쪽의 남문내(南門內) 조시(朝市), 다른 하나는 남대문 밖에 개설된 칠패(七牌) 시장이 그것이다. 남문내 조시는 시전 행랑 중에서 새벽시장을 가리켰으며, 칠패 시장은 조선후기 서울의 3대 시장 중 하나로 거대 시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이후 도로개수사업의 결과 남문내 조시와 칠패 시장은 선혜청(宣惠廳) 창내장(倉內場)으로 통합되어 새로 형성되었고 그것은 이후 남대문시장의 원형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서울 남부에 언제인지는 모르나 선혜청 창고 앞에 조시가 열리기 시작했다. 간혹 그 시기를 상평창(常平倉)이 설치되기 시작한 조선초기부터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조선초기에 시전(市廛)이 설립될 당시에는 남대문까지 시전의 행랑이 가득 차 있었으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개연성은 남아 있다. 남대문 옆에 선혜청의 창고가 설치된 선조 대 이후 남대문시장이라고 불리는 명칭이 칠패 시장 이외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남대문 안쪽에서 조시의 형태로 시장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대문 주변에는 2개의 대형 시장이 존재했다. 하나는 앞서 말했듯이 남대문로 주변에 형성된 남문내 장시가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대문 밖에 형성된 칠패 시장이다. 칠패 시장은 서울의 3대 시장 중 하나로 거래나 자본이 시전을 능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말 외국 자본이 점차 서울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남대문 주변의 시장이 재편되기 시작했다.

남대문 주변의 두 시장은 1896~1897년 남대문로 정비사업의 과정에서 모두 선혜청 안으로 옮겨져 재편되었다. 그리고 시장의 명칭을 남대문시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대문시장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개항 이후에도 남문내 시장은 크게 위축이 되지 않고 번성하고 있었다. 대개 새벽시장의 형태로, 주로 점포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도매시장의 기능을 수행했다. 새벽 일찍 부패하기 쉬운 물건은 다 팔리고 그 이후부터는 일반 주민들을 상대로 소매 형태의 시장을 형성하였다.

한편 남문내 시장 상인들은 이곳으로 진입하려는 외국 상인 세력에 맞서서 대응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 상인들은 자신들이 근거지로 삼고 있던 진고개를 넘어 남문내 시장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결국 1892년(고종 29)부터 차츰 상점을 개설하더니 청일전쟁 전후로 30여 개의 점포가 남문내 조시에서 활동하였다.

칠패 시장은 서울의 종로와 더불어 상업이 가장 번성한 지역 중 하나였다. 일본 상인들이 칠패 시장에 진출하려고 하자 상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1895년(고종 32)까지 일본 상인들은 남대문에 거의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1896년(건양 1) 남대문로 개수사업이 시작되어 선혜청으로 시장이 옮겨갈 때까지 남문내 장시와 칠패는 일본 및 청국 상인으로부터 어느 정도 독자적 상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직 및 역할

1897년(광무 1) 1월 남대문 주변의 가가(假家)들을 철거하고 옮겨 설치된 남대문시장은 주변에 가가(假家) 뿐만 아니라 인근 칠패 시장의 상인이나 선혜청 앞에서 노점을 하던 행상까지 모두 수용한 대규모 시장이었다. 1899년(광무 3) 2월 당시 남대문시장의 점포별 구성은 우전(隅廛) 3고(庫), 미전(米廛) 14고, 어물전(魚物廛) 36고, 생선전(生鮮廛) 3고, 행화상(行貨商) 10고, 엽초전(葉草廛) 22고였다. 특히 어물전과 생선전은 칠패 시장의 전통을 이어온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1900년(광무 4) 4월이 되면 남대문시장의 구성이 크게 변하여 미전은 27고에서 71칸(間)으로, 어물전은 16고에서 46칸으로, 과전(果廛)은 13고에서 26칸으로 잡물전(雜物廛)은 17고에서 44칸이 되었다. 창고의 숫자가 대폭적으로 늘어났음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남대문시장은 결국 미곡, 어물, 과물 등과 같이 서울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대문시장에서는 창고를 가진 점포가 대략 150여 개소, 영업을 하는 상인은 350~400명 정도에 이르렀고 연중무휴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하여 시장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한다면 매일 이곳에 몰려드는 인원은 거의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남대문시장은 도시 재래시장의 원형이 되었으며 일본인이 점유한 도성의 남부지역에 한국인의 상업 근거지로서의 기능도 수행했다. 또한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자체적으로 조직을 구성하여 건물의 수리, 시장의 경비 및 관리 등을 담당했다.

변천

시장의 입지는 도로 여건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남대문시장 도로 개수는 1895년(고종 32) 4월부터 진행되었다. 도로 개수를 위해서 가가(假家)에 대한 금령(禁令)이 시행된 것이다. 한성부의 도로 개수는 고종의 주도 아래 서울 개조 구상이 구체화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남대문 일대의 가가는 대부분 철거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가가 상인들의 생존 문제가 불거졌는데, 결국 남대문 내외에 있었던 미전(米廛), 우육전(牛肉廛) 등을 선혜청 창고 안쪽으로 옮겨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선혜청 창내장(倉內場)이 1897년(광무 1) 1월에 설립되었다.

조정에서는 선혜청의 동대청(東大廳)에 이어진 곳간과 마당을 가로질러서 시장의 장터로 제공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이후 그에 소요되는 건설비로 2,196원이 지출되었다. 당시 선혜청 안쪽으로 시장을 이설하는 것은 합당한 곳을 확보할 때까지로 한정하였지만 결국 다른 곳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눌러 앉아 지금의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선혜청 창내장은 행정구역상 한성부의 서서(西署) 양생방(養生坊) 창동(倉洞)에 속하였고 지금은 서울시 중구 남창동이다. 그러나 시장 이설 공사는 예상보다 커서 이후에 400원이 추가되었다.

선혜청 창내장이라는 이름의 남대문시장은 한성부를 근대 도시로 개조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다. 더불어 유통기구를 근대화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남대문시장은 3~5일장 체제의 재래 정기시는 물론 매일 새벽에 한시적으로 열리는 조시와는 다른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었다. 또한 최초의 상설시장이라고 전해온 광장시장보다도 10여 년 일찍 운영되었다.

남대문시장에 개설한 점포들은 시전처럼 입점 초기부터 국가에 어떠한 공식 부담을 지지 않았다. 그래서 1899년부터 농상공부는 남대문시장에 대한 수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1901년(광무 5) 수세권은 곧 내장원으로 옮겨졌다. 대한제국 정부는 수세에 대한 보상으로 건물의 수리를 전담하기도 하고 영업권을 보호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남대문시장은 인근 시장들의 상권을 흡수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내장원의 운영권이 사라지자 남대문시장의 위상도 같이 약화되었다. 송병준의 대리인이었던 김시현이 남대문시장의 새로운 관리자로 등장하자 수세의 성격도 바뀌었다. 김시현은 창고 사용료만 납부하던 방식에서 부지 사용료인 지단세(地段稅)를 추가 징수했다.

1910년 대화재로 남대문시장은 존속 자체가 어려워졌다(『순종실록』3년 5월 4일). 조선총독부는 자연 소멸을 기대했지만 송병준의 조선농업주식회사에서 시장 복구를 이유로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1921년 조선농업주식회사는 시장 경영권에서 손을 떼고 대신 일본인 경영의 중앙물산주식회사로 소유가 넘어갔다. 오늘날 남대문시장의 시장권은 이때 구축된 것이다.

    1. 그림1_00017239_『용산합병경성시가전도』(1911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서3244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동환, 『朝鮮後期 서울 商業發達史硏究』, 지식산업사, 1998.
  • 고동환,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태학사, 2007.
  • 박은숙, 『시장의 역사』, 역사비평사, 2008.
  • 전우용, 「대한제국~일제초기 선혜청 창내장의 형성과 전개-서울 남대문시장의 성립 경위」, 『서울학연구』12,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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