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감영(京畿監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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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경기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경기(京畿)라는 명칭은 고려 1018년(고려 현종 9)에 성립되었다. 왕경(王京)의 물적 기반을 담당하였으며, 왕도의 외곽 지역을 의미하는 지방행정조직으로 쓰이는 경기의 모체가 되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는 좌·우도로 분할하여 각각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를 파견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13년(태종 13)에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를 파견하였다. 감영은 수원에 설치하였으나 곧 광주로 옮겼으며, 1460년(세조 6)에 서울 돈의문 밖으로 옮겨졌다가, 1886년(고종 23)에 다시 수원으로 옮겨 현재에 이른다. 1895년(고종 32)에 경기는 3부 34군으로 분리되어 폐지되었으나, 1896년(고종 33)에 다시 경기로 복구되었으며, 1910년(순종 3)에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어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경기라는 명칭이 성립된 것은 1018년(고려 현종 9)이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개주(開州)가 개성부로 승격되면서 개성부 주변 경현(京縣)에 해당하는 적현(赤縣) 6고을과 기현(畿縣) 7고을이 설치되었다. 이후 현종대에 적현과 기현 13고을을 합쳐 경기라 통칭하였다. 적현과 함께 왕경의 물적 기반을 담당하였으며, 왕도의 외곽 지역을 의미하는 지방행정조직으로 쓰이는 경기의 모체가 되었다. 경기 지방은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좌·우도로 분할되었다. 이후 경기를 더 넓혀서 양광도·교주도·황해도의 일부를 좌·우도에 귀속시키는 한편, 좌·우도에 각각 관찰출척사를 파견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좌도와 우도를 1402년(태종 2)에 경기좌우도성(京畿左右道省)이라 하고 관찰사가 파견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를 파견하였고 감영을 수원에 설치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경기좌·우도를 고쳐서 다만 경기라고 칭하였다(『태종실록』 14년 1월 18일).

경기관찰사는 일명 감사(監司)라 하며, 지방의 우두머리라는 뜻에서 방백(方伯) 또는 도백(道伯)이라고도 불렀다. 경기관찰사는 경기의 행정·사법·군사의 전권을 가졌으며, 관하 주현의 수령을 감독하였다. 관찰사를 보좌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종4품의 경력(經歷)과 종5품의 도사(都事), 판관(判官) 등을 파견하였으며, 그 밖에도 종9품의 심약(審藥)과 검율(檢律)이 각각 1명씩 있었다.

수원에 설치되었던 경기감영은 이후 광주로 옮겼는데 경기관찰사가 광주목사를 겸임하였기 때문이다. 경기감영이 광주로 옮겨진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1448년(세종 30) 이전에 이미 수원의 구영(舊營)이 폐지되고 광주로 옮겨 간 것으로 보인다. 1460년(세조 6)에 광주의 경기감영을 폐지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기감영이 광주에 있었던 시기는 1448~1460년으로 여겨진다. 이후 경기감영은 돈의문 밖 반송방(盤松坊)에 설치되었다가 1886년(고종 23)에 다시 수원으로 옮겨졌다.

조직 및 역할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를 두고, 그 밑에 수령관으로 4품 경력 또는 5품 이하 도사를 두어 관찰출척사를 보좌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2년(태종 2)에 좌·우도를 합하여 경기좌우도라 부르고 관찰사와 수령관 각 1명만을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좌·우도를 합하여 경기관찰사라고 부르다가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개칭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도관찰출척사를 관찰사로 개칭하고 수령관 중에 경력은 없애고 도사만을 두었다.

관찰사는 도의 행정·군사·사법을 포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으며, 관하 각 수령의 근무성적을 평가하고, 호적·군적·요역 등 인적 자원의 확보와 관리, 경지·산릉·소택·광산·염분·목장과 같은 재원과 수세의 관리 등 국가재산을 관리하는 임무를 띠었다. 또한 권농과 형옥, 교육과 교화도 관찰사의 임무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했다.

관찰사를 보좌하는 경력이나 도사의 경우, 경력을 두면 도사를 두지 않고, 도사를 두면 경력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가 함께 재직하면서 자기 사무를 분장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경력과 도사는 비록 관품의 높고 낮은 차이는 있더라도 직무의 내용은 동일하였다. 도사는 도를 규찰하고 관찰사의 유고 시에는 감사를 대행하였으며, 관찰사가 각 지역을 순회할 때에는 관찰사와 소관 지역을 나누어 순찰하기도 하였다. 특히 도사는 도내의 감찰, 사법, 향시, 감시, 교생고강 및 전정·군정 등의 사찰과 감독 업무를 띠었다.

판관은 세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대읍 수령의 부관격인 판관으로 국초 이래 각 도의 계수관인 부·목에 설치하였다가 중기 이후에 제주·경성(鏡城)을 제외하고 모두 폐지하였다. 둘째로 조운과 관련하여 경기에는 수운판관을 설치하였으나 이것도 후기에 폐지하였다. 셋째는 관찰사가 부임하여 감영 소재 읍의 부윤 또는 목사·부사를 겸임할 때 영하(營下) 읍에 두는 판관이 있었다. 경기에는 특수사무를 위하여 좌도수운판관·우도수운판관·광주판관·여주판관·수원판관 5명을 두었으나, 『속대전』에는 우도수운판관·광주판관·여주판관·수원판관을 폐지하였다.

관찰사의 속료로서 국초부터 파견되었던 검률과 심약 및 후기에 새로 설치된 중군 등이 있었다. 검률과 심약은 각각 형조와 전의감에서 차송되는 임기 15개월의 무록관이며, 검률은 율의 해석·적용과 집행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고, 심약은 의원으로 감영과 병영 등의 의약 사무를 관장하였다. 8도 감영에 1명씩 배치된 중군은 정3품 당상관으로 병조에서 차송되며 도내의 군사 업무를 관장하였다.

경기관찰사는 4개의 목과 7도호부·7군·19현을 관할하였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종2품 관찰사 1명, 광주·여주·파주·양주에 정3품 목사 4명, 수원·강화·부평·남양·이천·인천·장단에 종3품 도호부사 7명, 양근·풍덕·안산·삭녕·안성·마전·고양에 종4품 군수 7명, 용인·진위·영평·양천·김포에 종5품 현령 5명, 지평·포천·적성·과천·금천·교동·통진·교하·연천·음죽·양성·양지·가평·죽산에 종6품 현감 14명 등이 있었다.

변천

995년(고려 성종 14)에 설치된 적현 6고을과 기현 7고을이 통합하여 성립된 경기는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좌·우도로 분할되어 각각 도관찰출척사를 파견하고 수령관으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였다. 1392년(고려 공양왕 4)에는 도관찰출척사를 폐지하고 안렴사로 복구하면서 경력과 도사도 함께 폐지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4년(태조 3)에는 안렴사를 폐지하고 다시 관찰출척사를 복구하였다. 1401년(태종 1) 1월에 관찰출척사를 다시 안렴사로 바꾸었다가 11월에 다시 바꾸어 관찰사를 복구하였다. 경기좌도와 우도에는 1402년(태종 2)에 경기좌·우도성이라는 명칭으로 관찰사와 도사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경기도관찰사를 파견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23부제의 실시 결과 경기는 한성·인천·개성의 3부 34군으로 분리, 폐지되었다. 그러나 1896년(고종 33)의 13도제 실시에 따라 다시 경기도로 복구되었으며, 1910년에 중앙 직할지였던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어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이선희, 「18세기 경기도관찰사의 업무 실태와 특징」, 『장서각』제23집, 2010.
  • 이선희, 「조선후기 한성부 내 京畿監營의 입지연구」, 『서울학연구』ⅩLⅤ, 2011.
  • 이수건, 「경기도의 외관제와 향리」, 『경기도사』제4권, 2003.
  • 장병인, 「조선초기의 관찰사」, 『한국사론』4,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