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선혜청(京畿宣惠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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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경기선혜법을 시행하면서 대동세를 출납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

개설

선혜청(宣惠廳)은 대동세(大同稅)를 출납하는 관서로, 1608년(광해군 즉위)에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을 시행하면서 처음 설치되었다. 경기선혜법은 경기 지역에 부과된 공물과 요역을 토지세로 전환시킨 제도로, 토지 1결당 16두(斗)를 거둔 후, 지방 관아에서 쓸 1두를 남겨 두고 나머지는 중앙에 설치한 경기선혜청에 납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경기선혜청의 건물은 초기 상평청 건물에 함께 있었다고 하나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현존하는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에 따르면, “충청과 강원 양도의 대동은 경기선혜청에 합설하여 1청으로 하고 삼도선혜청이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호서대동법 시행 당시 경기선혜청에 강원청과 호서청을 합쳐 설치한 것으로 이해된다. 경기선혜청과 강원청, 호서청이 합설된 형태로 자리한 곳은 숭례문 안쪽이다. 후에 대동법을 영남과 해서 지역에 확대 시행하면서 본청의 규모를 늘리는 한편, 소의문 안쪽에 별청을 지어 청사를 넓혀 나갔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세기 무렵부터 군현에서 나지 않는 물산[不産貢物]을 공물로 분정(分定)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군현에 분정된 공물의 경우에도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폐단이 가시화되었다. 여기에 중앙과 지방관아의 연락을 위하여 지방의 수령이 서울에 파견한 경주인(京主人) 등이 부상대고(富商大賈)와 결탁하여 높은 값을 받고 공물을 대신 바치는 방납(防納)이 자행되면서 조정에서는 현물공납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다(『명종실록』 7년 9월 25일). 이러한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일부 군현에서는 명종대 말부터 수령이 고을 백성들에게 쌀을 거두어 공물을 대신 사서 바치는 사대동(私大同)을 시행하였으나 현물공납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1569년(선조 2)에는 이이(李珥)가 공물을 쌀로 대신 거두어 방납의 폐단을 해소하자는 내용을 담은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선조(宣祖)에게 올리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년 9월 25일). 그러나 대동법은 임진왜란이 종료되고 전후 복구사업을 진행하던 1608년에 이르러서야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반포되었다. 그런데 경기선혜법의 시행에는 공납제의 모순뿐만이 아니라 중앙의 정책적 요인들이 좀 더 복잡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사신의 방문 횟수가 늘어 이들을 접대하는 비용 부담이 컸던 데다가, 선조와 그 비의 죽음으로 왕릉을 조성하는 역 부담이 경기민들에게 가중되고 있었다. 이에 왕릉을 조성하는 데 따른 산릉역(山陵役)과 명나라 사신 접대에 필요한 조사역(朝使役)에 경기민들이 자주 동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물역과 같은 기타 역을 줄여 주는 방안이 조정에서 논의되었고, 결국 경기 지역에 가장 먼저 ‘선혜’라는 명칭으로 대동법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광해군일기』 즉위년 5월 7일).

요컨대 광해군대에 설립된 경기선혜청은 경기민이 담당하던 산릉, 조사역 외에 여타의 요역에 동원되는 것을 줄여 주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경기선혜법의 시행령인 대동사목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므로 구체적인 조직과 역할을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1608년(광해군 즉위년)의 선혜청 설치 기사를 살펴보면, 의정(議政)을 도제조로 삼고, 호조판서가 부제조를 겸하도록 하였으며, 낭청 2원을 두도록 하였다(『광해군일기』 즉위년 5월 7일).

변천

현존하는 『호서대동사목』을 살펴보면, “삼공은 도제조를 예겸(例兼)하고 호조판서는 제조를 예겸한다. 이 외에도 제조 2원이 있는데 삼도선혜청(경기청·강원청·호서청)과 상평청을 겸관한다. 낭청은 4원으로 각기 분장(分掌)하되 경기와 상평청 낭청 2원은 상호 겸찰하고, 충청과 강원 낭청 2원도 상호 겸찰한다.”고 하여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는 과정에서 도제조(삼정승) 3명과 제조 3명(1원은 호조판서 예겸), 낭청 4원 이하 산원, 서리, 고직으로 인적 구성을 정비해 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과세 방식은 초기에는 토지 1결당 16두를 봄·가을에 8두씩 나누어 거두되 1두를 지방관아에 남겨 두어 수령의 공사(公事)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그러나 1664년(현종 5) 이후 다른 도와 마찬가지로 수취액을 12두로 하향 조정하였다.

참고문헌

  • 『강원청사례(江原廳事例)』
  •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
  • 『호남청사례(湖南廳事例)』
  • 고석규, 「16·17세기 공납제(貢納制) 개혁의 방향」, 『한국사론(韓國史論)』 12, 1985.
  • 김덕진, 「16~17세기의 사대동(私大同)에 대한 일고찰(一考察)」, 『역사학연구』 10, 1996.
  • 이지원, 「16·17세기 전반 공물방납(貢物防納)의 구조(構造)와 유통경제(流通經濟)의 성격(性格)」,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1990.
  • 최주희, 「조선후기 왕실·정부기구의 재편과 서울의 공간구조」, 『서울학연구』 49, 2012.
  • 최주희, 「조선후기 선혜청(宣惠廳)의 운영과 중앙재정구조(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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