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령현(康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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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서남부 해안에 있으며 서쪽으로 옹진, 북쪽으로 해주, 동쪽으로 연안에 접하는 지역의 주민들을 관할하고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강령현(康翎縣)은 고려시대의 영강현(永康縣)과 백령현(白翎縣)을 합하여 설치된 현으로, 등산곶을 비롯한 군사 요충지와 황해도 남쪽 해안 지역을 관할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강령현은 황해도 서해안 등산곶 일대에 있던 영강진과 백령도의 백령진을 합하여 세워진 강령진(康翎鎭)에서 비롯하였다. 영강진은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진이(付珍伊)라 불렸고, 고려 초에 영강현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옹진현에 속하였으나 1106년(고려 예종 1)에 감무(監務)를 두어 가화현(嘉禾縣)까지 겸임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장연(長淵)과 합하여 연강(淵康)이라 불렸으나 곧 다시 영강이라는 이름으로 회복하였다.

백령진이 설치된 백령도는 고구려 때에는 곡도(鵠島)라 불렸다. 섬이 비옥하여 살기에 적합하므로 고려 초에 현이 설치되었고 진장(鎭將)이 파견되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거주하기 어려워지자 주민들을 육지로 옮겨 살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6년(태조 5)에 백령현을 폐하고 문화현(文化縣)에 합속시켰다(『태조실록』 5년 9월 28일). 1427년(세종 9)에 원래 백령진에 속했던 주민들이 새로운 진을 세워 읍의 명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 이를 수용하여 영강진과 백령진을 합쳐 강령진을 설치하였다(『세종실록』 9년 1월 19일). 그러나 1428년(세종 10)에 영강현과 백령현을 합하여 읍을 설치하였다는 기록도 있어 강령진이 세워진 정확한 연도는 파악하기 어렵다.

현으로 바뀐 연도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1433년(세종 15)에 지강령현사(知康翎縣事)양점(梁漸)이 사조(辭朝)한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433년 이전에 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세종실록』 15년 7월 18일).

조직 및 역할

강령현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에는 진이었으므로 첨절제사가 판현사(判縣事)를 겸하였으며, 세조대 이후로는 종6품 현감이 파견되었다. 강역 내 무지곶(無知串)의 순위량(巡威梁)에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군만호 1명이 배치되었다. 소속 군사는 진군(鎭軍) 65명, 선군(船軍) 35명이었다.

변천

강역 내에 있던 무지곶의 순위량 만호진은 세조 때에 가을포로 이설되었으며, 1611년(광해군 3)에는 등산곶으로 다시 옮겨 등산진(登山鎭)이 되었다(『광해군일기』 3년 10월 20일). 1871년(고종 8)에 서해안 방위를 위해 포군 20명을 두었고(『고종실록』 8년 10월 5일), 이듬해에도 다시 포군 25명을 추가로 두었다(『고종실록』 9년 12월 30일).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개편할 때 해주부 강령군이 되었으며, 1896년(고종 33)에 13도제 시행으로 황해도 강령군이 되었고, 1909년(순종 2)에 옹진군에 병합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강령(康翎)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강석화, 「조선 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한국문화』3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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