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객(喀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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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이후 동몽골의 60,000호 중 하나로, 오늘날 몽골 국민의 주축을 이루는 집단.

개설

객객(喀喀)은 몽골어 할하(Qalq-a: 현대 몽골어로 халх)의 한자어 표기인데, ‘방패’를 뜻하였다. 객이객(喀爾喀)으로도 표기하였다. 할하 만호는 예로부터 몽골을 외침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몽골(원)제국 이후 몽골은 크게 동몽골과 서몽골(오이라트)로 구성되었는데, 동몽골은 대략 60,000호로 구성되었다. 할하는 그중 하나로 16세기 말부터 강력해져 사실상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동몽골은 다시 남북으로 분열되어 결국 몽골 땅에는 세 개의 왕국이 존속하게 되었다.

할하는 1691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복속되면서 대략 19세기 말까지 할하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외몽골이 형성되었다. 1911년 12월 할하의 귀족들이 주를 이룬 독립운동이 일어나면서 몽골 독립을 선언하였다. 현재 몽골국은 옛 할하의 인구 및 영토를 기반으로 한 국가이다.

내용 및 특징

1368년 몽골(원)제국의 황제 토곤테무르가 명나라 군대에게 밀려 몽골의 본토로 돌아갔다. 그 이후 약 20년간 이른바 북원(北元)시대가 지속되었다. 이후 북원왕조는 중원에 대한 잃어버린 지배권을 되찾기 위하여 20여 년간 노력하였지만 실패로 끝났고, 몽골인들은 몽골제국 이전 시기와 같이 몽골고원에서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외국 땅에서 통치자로 있었던 권력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다투게 되면서 정치적 분열이 가속화하였다. 본토에 살아온 전통적인 귀족층은 중앙 권력과 대칸의 통제 범위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였다. 그 세력 가운데(중) 대표적인 것은 오이라트였는데, 그들이 몽골 정통 대칸과 권력을 다툴 정도로 부상하면서 몽골은 크게 동몽골과 서몽골 즉 오이라트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중국 명(明) 때 사료에서는 동몽골은 ‘달단(韃靼)’으로, 오이라트는 ‘와랄(瓦剌)’로 각각 표기되었다. 당시 동몽골은 좌우익 산하 각 30,000호[tümen], 즉 총 60,000호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좌익 30,000호 중 하나가 할하였다.

어떤 때는 오이라트가 강력해져 사실상 몽골 대칸의 통제 범위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는데 1480년대 이러한 분열 상태를 극복하여, 만두하이(Manduqai) 카툰과 바투뭉케 다얀(Batumöngke Dayan) 칸에 의하여 몽골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바투뭉케 다얀 칸은 몽골의 부흥을 이끌며 한동안 국력을 강화시켰지만, 자식들에게 영유지를 나누어 줌으로써 사실상 또다시 분열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다얀 칸이 죽은 후 그의 장자인 투르볼드(Törübolud)의 후손들은 몽골 대칸의 정통을 이어갔으나 나머지 자식들에게도 속민과 영유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점점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서 중앙 권력과 대칸의 통제 범위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였다. 그 대표적인 세력 중 하나가 할하 만호의 일부를 상속받은 바투뭉케 다얀 칸의 막내아들인 게레센제(Geresenje)와 그 후손이었다.

16세기 말부터 할하가 강력해져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동몽골은 다시 남북으로 분열되어 결국 몽골 땅에는 세 개의 독립국이 존속하게 되었다. 즉, 몽골은 크게 할하(몽골) 및 남몽골(내몽골), 그리고 서몽골이라는 세 영역으로 나뉘었다.

조직 및 역할

다얀 칸 때 할하 만호는 북쪽 7오톡(otoγ, 영(營)) 및 남쪽 5오톡으로 구성되었는데 전자는 게레센제가, 후자는 다섯째 아들인 알추볼드 (Alcubolud)가 각각 상속받았다. 남쪽 할하의 오톡들은 바린([巴林], Balin)·바유드(Bayud)· 자루드(Jarud)·우지예드(Üjiyed)·홍기라드(Qonggirad)로 이들은 1610∼1620년대 여진족의 후금(後金)에 복속되어 후일 내몽골에 흡수되었다. 현재 중국 내몽골자치구 바린 좌우 2호쇼[旗], 자루드([扎魯特], Jarud), 1호쇼는 남 할하인으로 이루어졌다.

북쪽 할하는 처음에 잘라이르(J̌ayir)·베수드(Besüd)·엘지긴(Eljigin)·고를로스(Gourlus)·후후이드(Köküyid)·하트긴(Qatagin)·우리양한(Uriyangqan)의 7개의 오톡이 있었는데 차츰 우네게드(Üneged)·케루드(Kerüd)·후리예 호로(Küriye qoruγu)·초오호르(Čoγuqur)·탕구드(Tangγud)·사르툴(Sartaγul)의 6개의 오톡이 새로 생기면서 13개가 되었다. 게레센제의 아들 7명은 이들 오톡을 나누어 상속받았으며 16세기 말에 이르러 좌우익의 7개의 호쇼로 구성이 되었다. 이때 할하인들은 알타이와 항가이 산맥을 중심으로 고비의 북쪽에 살고 있었다. 1636년 내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후로부터 할하가 몽골의 국가 전통, 즉 대칸의 정통을 이어가기를 주장하였다. 다만 1660년대부터 시작된 할하의 내란과 1688년 할하-오이라트 전쟁으로 인하여 할하의 지도자를 비롯하여 백성 대부분이 청나라 영토인 내몽골 지방으로 들어갔다. 1691년 할하가 공식적으로 청나라에 복속되었지만 1696년까지는 사실상 오이라트의 칸 갈단(Galdan)의 통치하에 있었고 그 동안 갈단은 청나라 군대와 몇 차례에 걸친 전투를 벌였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몽골 별부(別部)인 객객의 일종(一種)이 매우 강성하여 지금 바야흐로 군사를 동원해 변경을 침노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숙종실록』 21년 3월 21일).

청나라에 공식적으로 복속된 1691년부터 할하는 행정적으로 3개의 아이막(아이막을 통치하는 기관 이름인 출간[čiγulγan, 盟]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어 쓰기도 함)과 그 산하의 34개의 호쇼로 나뉘었다. 1725년 사인 노얀 아이막(Sayin noyan ayimaγ)이 설립됨으로써 18세기 후반부터 할하는 4개의 아이막과 86개의 호쇼로 구성되었다.

할하가 공식적으로 청나라에 복속되기 전에도 일부 할하 귀족들은 속민을 데리고 청나라에 항복하였는데 그들을 2개의 호쇼로 편성하여 내몽골에 귀속시켰다.

변천

1620년대에 남 할하가 후금에 복속되면서 이때부터 할하라는 명칭은 예전의 북 할하만을 가리키게 된 것으로 보인다. 1691년 할하가 청나라에 복속됨으로써 몽골의 외자사그([外扎薩克], γadaγadu jasaγ] 지역의 4부(部)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이 되면서 외자사그라는 용어가 외몽골이라는 용어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할하와 외몽골이라는 용어가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1921년 인민혁명으로 할하를 중심으로 하는 몽골국이 독립되었다. 현재 몽골국 인구 중 대략 80%는 할하 출신이다. 이처럼 할하가 몽골국의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일반 회화에서는 몽골국을 가리켜 ‘ 할하’라 부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Хөрвүүлсэн Ц. Цэрэндорж нар, Зарлигаар тогтоосон гадаад монгол, хотон аймгийн ван гүнгүүдийн илтгэл шастир, Согоо нуур, 2007. (Ts. 체렝도르지 등 역주,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傳)』, 소고오 누우르, 2007.)
  • Д.Гонгор, Халх товчоон, ШУА-ийн хэвлэх үйлдвэр, 1970. (D. 공고르, 『 할하의 약사』, 과학아카데미 출판부, 1970.)
  • Ts. Tserendorj, “On the name ‘Ger(e)sen(g)je jalayir qun(g)tayiji’”, Acta Historica vol. 6, Mongolian State University of Education, 2005. (Ts. 체렝도르지,「‘게레센제 잘라이르 홍타이지’라는 명칭에 대한 고찰」, 『Acta Historica』6권, 몽골국립교육대학교, 2005.)
  • Ц. Цэрэндорж, “Ар, өвөр, гадаад, дотоод Монгол хэмээх нэрийн тухай”, Нүүдэлчдийн өв судлал №10, 2010. (Ts. 첵메드 체렝도르지, 「북·남·외·내 몽골이란 명칭에 대하여」, 『유목민 유산 연구』vol. 10, 몽골국립중앙박물관, 2010.)
  • 첵메드 체렝도르지, 「14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북원과 고려의 관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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