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작(美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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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산현(岡山縣) 북동부 지역을 일컫던 옛 지명.

개설

내랑(奈郞)시대부터 명치(明治)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지리 구분의 기본단위였던 국(國)으로 산양도(山陽道)에 속한 8개국 중 하나였다. 작주(作州)라고도 하였다. 조선전기에 조선에 온 일본 사신·상인들이 이곳 출신임을 자칭하기도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과 일본 실정막부(室町幕府) 사이의 대등한 공식 외교는 15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은 일본 실정막부의 통치자인 장군(將軍)에게 통신사 등의 사절을 보냈고, 일본에서는 장군의 사절인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를 조선으로 보냈다. 조선과 가까운 구주(九州)와 중국(中國) 지방의 영주, 대마(對馬)의 세력도 조선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조선은 일본의 막부가 왜구를 근절해 주기를 원하였으나 막부는 통제력이 부족하였다. 조선은 왜구를 통제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지역 영주에게도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 근절을 요구하였고, 조선과의 교역으로 경제적·문화적 이익을 얻으려는 지역 영주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조선과 일본의 지역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졌던 것이다.

미작 지역은 조선에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기는 하나 바다에 면해 있지는 않았다. 1418년부터 미작 지역의 태수가 조선에 사신을 보내고 토산물을 바쳤으며(『세종실록』 즉위년 10월 13일) 조선으로부터 도서(圖書)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세종실록』 즉위년 11월 29일). 또한 미작수(美作守)를 자칭한 소조천지평(小早川持平)이라는 자가 1463년 7월 5일부터 1504년 4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사신을 보내고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성종실록』 1년 8월 25일)(『연산군일기』 10년 4월 29일).

미작수라고 하여 반드시 미작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정막부시대 이후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이는 수호대명(守護大名)이었고, 미작수와 같은 관위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소조천 가문이 미작수라는 칭호를 내세우면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던 시기는 미작 인근의 안예(安藝)를 근거로 한 중소 영주로 성장하던 때였다. 이때 소조천 가문의 유력 인물들은 미작수라는 관위를 지니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소조천지평의 활동 시기는 1463년~1504년인데, 그의 출생 연도가 1416년 이전인 것을 감안한다면 후반의 기록은 그가 사망한 후에 이름을 사칭한 자의 사절일 가능성이 있다. 1504년(연산군 10) 이후 『조선왕조실록』에 미작이라는 지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 『戰國人名事典』, 新人物往來社, 1990.
  • 『守護·戰國大名事典』, 東京堂出版, 1998.
  • 한문종, 「조선전기 日本國王使의 朝鮮通交」, 『한일관계사연구』 21, 한일관계사학회, 2004.
  • 市川裕士, 「安芸国人沼田小早川氏と室町幕府·守護」, 『ヒストリア』,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