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중(備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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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강산현(岡山縣) 서쪽 지역을 일컫던 옛 지명.

개설

내랑(奈郞)시대부터 명치(明治)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지리 구분의 기본단위였던 국(國)으로 일본의 고대~중세 간선도로 구분인 5기7도(五畿七道) 가운데 산양도(山陽道)의 8개국 중 하나였다. 원래는 길비국(吉備國)의 일부였다. 646년 일본에서 조정 안의 혁신파가 벌인 대규모 정치 개혁인 대화개신(大化改新) 후에 비전(備前)·비중(備中)·비후(備後)로 분할되면서 성립되었다. 1871년 명치(明治) 신정부에서 번(藩)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시행하면서 심진(深津)·소전현(小田縣)을 거쳐 1875년에 강산현(岡山縣)에 통합되었다.

형성 및 변천

672~686년경 길비국에서 분할되어 성립하였다. 겸창(鎌倉)시대 중기 이후는 집권(執權)인 북조씨(北條氏)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지가 되었다. 남북조(南北朝)시대에는 많은 수호(守護)가 교대하였지만 1392년 남북조가 통합되었을 때는 세천만지(細川滿之)가 수호가 되었고, 이후 전국시대(戰國時代)까지 세천씨가 세습하였다. 수호는 지방의 군사와 민정을 감독하는 직책이었다.

조선시대에 비중과 관련해서는 1462년(세조 12)부터 1504년(연산군 10)까지 조선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세조실록』 12년 7월 1일)(『연산군일기』 10년 4월 3일)

1582년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비중을 공격한 후 동서로 분할되어 동쪽은 우희다(宇喜多)씨가 서쪽은 모리씨(毛利氏)가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후 덕천씨(德川氏)에게 몰수당하여 막부(幕府)의 영지와 사령(私領)으로 분할되었다. 1871년 비중과 비후의 일부를 합쳐 심진현(深津縣)이 설치되었으나 1872년 비후가 분리되고 비중이 소전현이 되었다가 1875년 강산현에 통합되었다.

위치 비정

현재 강산현의 서쪽에 해당한다. 남동쪽은 비전국(備前國: 현 강산현), 북동쪽은 미작국(美作國: 현 강산현), 북쪽은 백기국(伯耆國: 현 조취현(鳥取縣)), 서쪽은 비후국(備後國: 현 광도현(廣島縣))에 접해 있고, 남쪽은 뇌호내해(瀬戶內海)에 면해 있다.

참고문헌

  • 『일본서기(日本書紀)』
  • 『속일본기(續日本紀)』
  • 『화명초(和名抄)』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三省堂編修所, 『日本地名事典』, 三省堂, 2007.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