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포(鰐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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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상대마정(上對馬町)에 위치한 항구로 근세 시기 조선으로 도해하던 거점.

개설

중세 시기부터 대마도에 있었던 항구였다. 조선으로 도해하는 거점으로서 근세 시기에는 그 관리와 감시를 위하여 관소(關所)가 설치되어 있었다.

자연환경

지형지세는 마을 북쪽으로 복잡한 굴곡의 리아시스식 해안이 발달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경사가 급한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해안과 마을이 주변이 모두 단애절벽과 급사면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해저지형은 해율도(海栗島)와 해로도(海老島)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악포 근해가 계단 모양의 해안 단구(段丘)와 익곡(溺谷)을 이루고 있었다. 바다와 산이 대부분인 악포에는 논이 없고, 밭도 좁으며 암반이 많은 토질에다 이용 가능한 산림면적도 좁아 농업이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해저에는 해조류·패류·어류 등의 각종 수산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어업이 발달하였다.

형성 및 변천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비전(肥前) 명호옥(名護屋)과 부산을 연결하는 기항지(寄港地)로서 여러 일본 장수들의 창고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1592년 출병을 대기하고 있던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씨(宗氏)는 악포에 진을 설치했었다. 1702년 강호(江戶) 막부(幕府)가 편찬한 일본도(日本圖)에 악포는 15척 정도를 정박할 수 있는 남동풍이 좋은 포구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1748년(영조 24) 통신사행(通信使行) 때 부사 남태기(南泰耆)가 탄 배가 악포에서 불에 타서 가지고 가던 인삼·무명·무용향 등의 예물이 불에 타고, 2명이 사망하고 부상 입은 사람이 10여 명이나 되었다(『영조실록』 24년 3월 1일). 1809년(순조 9) 대마도에 도해하였던 현의순(玄義洵)·최석(崔昔) 등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별단(別單)으로 대마도의 사정을 보고하였다. 그 내용은 대마도의 북쪽에 악포와 좌수포(佐須浦)가 있는데 대마도와 조선의 선박이 모두 여기를 통하여 왕래하며, 이를 대풍소(待風所)라고 하는데, 대풍소에서 북으로 부산포(釜山浦)에 이르기까지가 480리(약 188.5㎞)이고 남으로 대마도 부중(府中)까지가 320리(약 126㎞)라는 것이었다(『순조실록』 9년 12월 2일).

위치 비정

악포의 포구(浦口)는 북서로 향하고, 동쪽으로는 풍(豊), 남쪽으로는 대포(大浦), 하내(河內)와 인접해 있었다. 악포 항구에서 북쪽 1.5㎞ 해상에 해율도가 있고, 남쪽 대포와의 경계에 고려산(高麗山)이 있으며, 동남쪽 풍과의 경계에 비산(鼻山, 168m)이 있었다.

참고문헌

  • 한상복, 「일본 대마도 어촌 와니우라(鰐浦)의 사회조직과 변화」, 『韓國文化人類學』 24, 1992.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三省堂編修所, 『日本地名事典』, 三省堂, 200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ー,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