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롱초(吾弄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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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함경도 회령에 위치한 여진족의 거주지.

개설

오롱초는 함경도 회령부에 소속된 곳으로, 조선전기에 주로 알타리(斡朶里)족이 거주하였다. 이들은 조선에 조공(朝貢)을 바치고, 관직을 받으며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제종올적합(諸種兀狄哈)의 위협이 있을 때마다 조선에 방어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위치 비정

오롱초는 원래 여진인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육진을 개척하면서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단종실록』에 의하면 오롱초는 회령진(會寧鎭)에서 북쪽으로 20리(약 8㎞) 강 안쪽에 위치한다고 하였다(『단종실록』 3년 12월 12일). 또한 『세종실록』「지리지」 회령도호부조에 연대(烟臺)의 목록이 등장하였다. 이때 오롱초는 북쪽으로 고령 전봉(高嶺前峯), 남쪽으로 오산(鰲山)에 응한다고 하였다. 이 내용은 조선후기의 자료인 『여지도서』에도 비슷하게 기재되었다. 이를 토대로 오롱초는 회령 시가지에 있는 오산과 고령의 사이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조건에서 앞서 회령진의 북쪽으로 20리가량 떨어진 곳을 찾으면 현재의 북한 궁심로동자구 일대가 오롱초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

회령은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비롯한 알타리의 중심 세력지였다. 따라서 이곳과 가까운 오롱초에도 알타리가 주로 거주하였다. 이들은 조선에 홀라온올적합(忽剌溫兀狄哈) 등의 소식을 조선에 알려 주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1년 9월 27일). 이러한 관계를 통하여 양자는 신뢰를 구축하였다. 예를 들어, 1440년 7월에 김종서는 사성올적합(四姓兀狄哈)이 오롱초에 침입한다는 보고를 듣고, 군사를 보내 시위(示威)하자 올적합이 소득 없이 물러났다고 한다(『세종실록』 22년 7월 21일).

한편, 오롱초의 여진인은 조선에 조공하였다. 1440년 7월에 아하리(阿下里)가 내조한 것이 그 최초의 사례였다(『세종실록』 22년 7월 27일). 이후 건주좌위(建州左衛)의 범찰(凡察) 등이 이주하면서 회령과 종성 일대에 군소 추장들이 난립하였다. 이때 오롱초의 추장이 된 것은 이귀야(李貴也)였다. 그는 최소한 문종대부터 이곳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고, 단종대에는 만호(萬戶)의 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함길도도체찰사이사철은 야인 족류의 강약을 등급을 나누어 보고하였는데, 이때 이귀야는 그 족류의 강성함을 들어 1등으로 분류하였다(『단종실록』 3년 3월 24일).

세조대에 이 지역 여진인이 상경하여 조선의 관직을 받는 빈도가 늘어났다. 1455년 12월에 동돈도(童敦道)가 오롱초 등처 만호, 1459년 1월에 낭금세(浪金世)는 만호, 1465년 1월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낭금세는 본처 만호,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이가홍(李家紅)은 본처 도만호(都萬戶) 등에 임명된 것이었다(『세조실록』 1년 12월 29일)(『세조실록』 5년 1월 30일)(『세조실록』 11년 1월 8일)(『세조실록』 11년 1월 13일). 낭금세의 아들 낭도랑가(浪都郞可)는 대를 이어 조선에 내조하였고, 1471년 1월에 도만호로 임명되었다(『성종실록』 2년 1월 14일). 그가 1492년까지 조선에 내조한 것으로 보아 성종대까지 내조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승방략(制勝方略)』
  • 『학봉전집(鶴峯全集)』
  • 『여지도서(輿地圖書)』
  • 『북로기략(北路紀略)』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한성주, 『조선전기 수직여진인 연구』, 경인문화사, 2011.
  • 김구진, 「吾音會의 斡朶里 女眞에 대한 연구」, 『사총』 17, 197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