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현(堂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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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교외의 제사 기능을 하는 당(堂)이 있던 고개를 일컫는 말.

개설

한양 도성 외부의 교외 지역에는 당현(堂峴) 지명을 가진 곳이 동부의 창신방, 용산의 문배산, 불암산 아래, 왕십리 4곳에 있었다. 신당(神堂), 성황당, 미륵당 등이 있던 고개라는 명칭으로 고대부터 제사 기능을 담당하던 시설이 있던 곳을 지칭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용산의 당현이 자주 등장한다. 도성과 가까우며 사건, 사고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전기에는 주변에 인가가 드물어 도적들의 웅거지로 이용되었다. 세조대에는 정부의 관원들이 습격당하고 야간에는 도적들이 돈의문(敦義門)까지 쳐들어와 민가를 약탈하였다(『세조실록』 13년 11월 25일). 숭례문(崇禮門)을 지나 청파역(靑坡驛)에서 당현까지는 주인 없는 시신이 버려지거나 무덤이 많이 만들어져 북망산(北邙山)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특히 국사범이나 죄인들을 사형시키는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죄인을 처결할 때 능지처사(陵遲處死)는 저자에서 시행하였고, 처참(處斬)할 자는 당현에서 거행하였다(『선조실록』 39년 12월 20일). 숙종대에 장희빈의 저주 사건에 관련된 자들이 참형된 곳이기도 하다(『숙종실록』 27년 10월 3일).

명칭 유래

제사 기능을 하는 당이 있어서 지명과 결합하여 명칭이 만들어졌다.

위치 비정

도성 동부의 창신방, 용산의 문배산, 불암산 아래, 동대문 외부 왕십리 4곳에 있었다.

관련 기록

숙종대에 갑술옥사(甲戌獄事)에 연루되었던 민암(閔黯)의 서자 민유도(閔有道)를 당고개[堂峴]에서 교형(絞刑)에 처하고, 민암의 처·첩과 딸·며느리는 모두 각 고을의 종으로 삼고, 그 아들과 조카들은 먼 곳에 유배하였다(『숙종실록』 27년 11월 28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경지략(漢京識略)』
  • 나각순,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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