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통교(廣通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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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성에서 종로를 거쳐 숭례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가는 간선대로 상에 위치한,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가장 큰 다리.

개설

광통교(廣通橋)는 종로 사거리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가다가 청계천이 지나는 곳에 놓인 다리이다. 조선시대 행정 구역상 광통방(廣通坊)에 위치하였다고 해서 광통교 혹은 광교(廣橋)라고 불렀다. 조선전기에는 북광통교(北廣通橋), 후기에는 광충교(廣沖橋)라고 기록된 경우도 있다. 광통교는 대광통교와 소광통교 2개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광통교는 대광통교를 말하는 것이었다. 청계천 하류로부터 여섯 번째에 있었다고 해서 육교(六橋)라고도 불렸다.

광통교는 조선시대 도성에서 가장 큰 다리였다. 다리의 길이는 12m, 폭은 15m 정도로 추정한다. 조선 건국 초에는 흙으로 건설한 흙다리[土橋]였다고 하는데, 나무다리 위에 흙으로 덮어 만든 다리로 여겨진다. 홍수가 나는 경우에는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여 1410년(태종 10)에 돌다리[石橋]로 만들었다. 이때 조달한 석교의 자재는 신덕왕후(神德王后)강씨의 묘소를 옮기고 난 뒤 옛 정릉(貞陵)에 있던 석물들이었다(『태종실록』 10년 8월 8일). 이 석물들을 다리의 교각과 기초로 사용하였다. 또한 건국 초부터 광통교 인근에는 시전(市廛)이 설정될 정도로 번화가였다. 당시 조성된 시전은 대시(大市)였다(『태종실록』 10년 2월 7일).

명칭 유래

도성 내의 행정 구역에서 광통방에 위치한 데서 광통교라는 말이 유래하였다. 광통방은 남부(南部)에 소속되었고 남부는 모두 11방(坊)이었다. 11방은 광통방·호현방(好賢坊)·명례방(明禮坊)·대평방(大平坊)·훈도방(薰陶坊)·성명방(誠明坊)·낙선방(樂善坊)·정심방(貞心坊)·명철방(明哲坊)·성신방(誠身坊)·예성방(禮成坊)이다(『세종실록』 지리지 경도 한성부).

자연 환경

북쪽으로는 백악산과 삼각산, 서쪽으로는 인왕산, 남쪽으로는 관악산이 아우르는 환경이다.

형성 및 변천

광통교는 건국 초부터 건설되었으며 태종대인 1410년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석축으로 조성되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직전인 1896년(고종 33)에 고종은 내부령(內部令) 제9호를 포고하여 황토현(黃土峴)에서 흥인문(興仁門)까지, 그리고 광통교에서 숭례문까지의 도로 규정을 새롭게 조정하였다[『고종실록』 33년 9월 29일 양력 2번째기사].

1910년(순종 3)에 광통교 인근의 전차선이 복선화되면서 다리 위로 전차가 다니게 되었고, 그 결과 다리 본체가 도로 아래로 묻히게 되었다. 1958년에 청계천 복개 공사를 시작하면서 광통교의 난간은 창덕궁으로 이전하였고 다리는 그대로 묻혔다. 2005년에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오늘날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위치 비정

종로와 숭례문 사이에 흐르는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위치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조흥은행 본점 앞에 놓여 있었는데, 현재는 그 위로 옮겨져서 놓였다.

관련 기록

광통교는 숭례문을 통해 종로로 들어가는 길목이었으므로 좌판을 벌여 장사를 하거나 품팔이하는 사람이 많았다(『광해군일기』 12년 3월 21일). 사람의 왕래가 많았으므로 봄철 춘궁기에 진휼을 시행하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순조실록』 14년 12월 19일). 광통교 인근의 시전에는 미전이 많았다. 서남쪽 청계천 주변에는 서화를 취급하는 가게가 운집해 있었다. 근처에 도화서가 있었기 때문에 서화 매매 장소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번화가였으므로 주변 천변에 걸인들의 움막도 다수 운집해 있었다.

개화기에는 청국 상인이 몰려오면서 인근 명례방과 북창동이 그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청국 상인은 임오군란 이후 진출하였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 상인들도 영업하기 시작했다.

광통교는 궁궐에서 나와 도성 밖으로 나갈 때 왕이 행행하는 주요 행차로였다. 특히 한강 이남으로 가는 경우에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행행로였기 때문에 도성 내 백성들에게 왕의 의지를 보이고 위의(威儀)를 선전하기 좋은 장소였다. 동시에 백성들이 다리 위에서 격쟁(擊錚)을 하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영조는 1728년(영조 4)에 전국적으로 발생한 무신난을 진압한 뒤, 숭례문에서 헌괵의(獻馘儀)를 거행하려고 광통교를 지나면서 구경하러 나온 부로들에게 유시(諭示)를 하기도 하였으며(『영조실록』 31년 5월 6일), 준천을 거행하면서 광통교에서 그것을 지켜보기도 하였다(『영조실록』 38년 5월 1일). 광통교 인근의 준천은 고종대에도 친군영군에 의해 수표교까지 거행하였다.

광통교는 민속적으로도 활용되었다. 영조대에는 상원일(上元日)에 민간에서 답교(踏橋)를 하던 곳이다. 당시 민간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날 밤에 다리를 밟으면서 한 해의 재액을 면한다고 믿었다. 답교는 광통교를 중심으로 12개의 다리를 중심으로 진행하였다(『영조실록』 46년 1월 14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도잡지(京都雜誌)』
  • 『여지도서(輿地圖書)』
  • 『한경지략(漢京識略)』
  • 『한양가(漢陽歌)』
  • 신병주, 『영조 때의 청계천 공사와 그 기록들-준천사실과 준천시사열무도』, 책과함께, 2007.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하천』, 서울특별시, 2000.
  • 이근호, 조준호, 장필기, 심승구, 『조선후기 수도방위체제』,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1998.
  • 김취정, 「개화기 서울의 문화 유통 공간-광통교 일대의 서화(書畵)·도서(圖書) 유통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53, 2013.
  • 염정섭, 「조선후기 한성부(漢城府) 준천(濬川)의 시행」, 『서울학연구』11, 1998.
  • 이왕무, 「영조의 私親宮·園 조성과 행행」, 『장서각』15,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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