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단진(碧團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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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벽동군에 속한 첨절제사진.

개설

벽단(碧團)은 고려시대에는 여진에 점거되었던 지역으로 공민왕대에 압록강 중상류로 진출하면서 영토로 확보하였다. 이때 벽단은 인근의 음동(陰潼)에 속했다가 이후 벽동군을 설치하자 그에 속하였다. 초기에는 구자(口子)라는 간략한 방어시설이었으나 보(堡)로 승격되었고, 이후에는 첨절제사를 파견하는 진을 설치함으로써 벽단진(碧團鎭)이 되었다. 벽단진은 인근 창성군의 창주진(昌洲鎭)과 더불어 압록강의 중류를 방어하는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여진족의 침입을 수차례 방어했던 격전지이기도 하다. 벽단진은 성의 협소함과 수원(水源)의 부족, 압록강과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등 전략적인 약점으로 인해 성종대에 1㎞가량 물려 쌓게 된다.

명칭 유래

벽단은 본래 ‘푸른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가리키던 고유어 ‘부루다니’의 이두 표현이다. ‘부루’는 숲을, ‘다니’는 골짜기를 의미한다. 이후에 벽단의 ‘벽(碧)’과 음동(陰潼)의 ‘동(潼)’을 합쳐 벽동군(碧潼郡)을 설치하게 된다. 음동은 본래 임토(林土)라는 지명이었는데, 이는 ‘푸른 숲이 있는 땅’이라는 의미이다. 즉, ‘숲’을 의미하는 ‘부루’에 땅을 의미하는 ‘도’를 합친 말이다. 1357년(고려 공민왕 6)에 이성만호(泥城萬戶)김진(金進)이 가서 벽단과 임토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임토를 음동으로 바꾸어 벽단을 예속시켰다가 이후에 다시 분리하고 벽단구자(碧團口子)를 설치하였다. 이후에 첨절제사의 진을 개설하여 벽단진(碧團鎭)이 되었다.

자연 환경

벽단진은 압록강과 불과 1㎞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으면서 산림이 무성했다. 벽단진은 동쪽과 서쪽으로는 산을 끼고 있었지만 대체로 평이한 지역에 설치되었다.

형성 및 변천

1402년(태종 2) 4월, 평안도에 창성군(昌城郡)·석주(石州)·이주(理州)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벽단과 음동의 백성들은 창성군에 속하여 우익단련사(右翼團練使)로 하여금 수령을 겸하게 하였다(『태종실록』 2년 4월 25일).

1403년(태종 3) 6월, 벽동군을 설치하고 강계도(江界道)에 소속시켰다. 창성은 이성도(泥城道)에 있었으므로, 벽동군을 별도로 두어 강계도에 소속시킨 것은 창성과 벽동의 관할을 구분한 것을 의미한다(『태종실록』 3년 6월 29일). 1415년(태종 15)에는 이성도의 이름을 삭주도(朔州道)로 바꾸었는데, 1418년(태종 18)에는 창성과 벽동이 삭주도에 예속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벽동과 창성은 또다시 하나의 군익도(軍翼道)에 소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태종실록』 18년 3월 8일).

벽동과 창성의 관할 군익도를 나누었다가 다시 묶은 이유는 벽동의 벽단과 창성의 창주가 거리 면에서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둘 다 여진족의 침입로에 해당하여 일관된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의 내지로 들어갈 수 있는 대로가 있었으며 창주와 벽단을 통해 들어가는 지름길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적의 예상 침입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이를 하나의 방어 구역으로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벽단은 압록강을 통해 내지로 진입하는 여진족의 침입이 빈번한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초기부터 구자를 두고 강변에 목책을 설치하여 여진족의 도발에 대비하였다. 1437년(세종 19) 2월에는 여연절제사(閭延節制使)홍사석(洪師錫)의 건의에 따라 벽단에 별도로 천호(千戶)와 만호(萬戶)를 두게 되었다(『세종실록』 19년 2월 20일). 같은 해 12월,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가 3천여 명의 여진 기병을 이끌고 벽동을 침입하여 강변의 벽단 목책을 파괴하였다(『세종실록』 19년 12월 13일). 지벽동군사(知碧潼郡事)신진보(辛晉保)와 벽단부만호(碧團副萬戶) 허유강(許惟剛)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였으나 참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세종실록』 20년 1월 27일). 벽단 목책은 재건되었으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압록강 변에 대한 관방 시설의 구축이 본격화되면서 석보(石堡)를 축조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타났다.

1440년(세종 22) 9월, 도체찰사황보인(皇甫仁)의 건의로 벽단 구자에 6,297자 5촌(약 1.9㎞)의 석보와 36,014자(약 10.9㎞)의 행성(行城)을 쌓기로 결정했다(『세종실록』 22년 9월 15일). 황보인은 종사관정이한(鄭而漢)을 보내어 이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그 결과 이듬해 3월 15일에는 30,795자 6촌(약 9.3㎞)의 석축성과 5,218척 4촌(약 1.6㎞)의 녹각성(鹿角城)의 행성이 완성되었다(『세종실록』 23년 3월 15일). 그러나 이때 쌓은 벽단의 행성은 지나치게 빠르게 작업을 진행하여 부실한 점이 많아 계속해서 무너졌으므로 정이한은 결국 탄핵을 받았다.

1475년(성종 6) 벽단은 또다시 건주위 여진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1467년(세조 13)에 명의 요청을 받아들여 출병하고 이만주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건주위의 여진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평안도에 대한 약탈을 자행했고, 압록강에 잇닿은 벽동은 그 집중적인 공략의 대상이 되었다(『성종실록』 6년 2월 1일). 특히 벽단에 대한 공격에는 3~4천 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었다. 당시 여진족의 기병은 행성을 깨트리고 들어와 벽단을 포위하였으나, 함락에는 실패하고 약탈하는 데에 그쳤다(『성종실록』 6년 2월 6일). 이때 여진족은 벽단과 벽동을 수차례 공격했는데, 이 지역은 내지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벽단이 진(鎭)으로 승격된 계기는 여진족의 침입이 용이한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벽단진’이라는 표현은 성종대에 처음 나타나며, 이때 벽단보(碧團堡) 혹은 벽단구자라는 명칭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벽단이 첨절제사의 진으로 승격된 것은 1477년(성종 8) 11월이었다. 당시 병조에서는 벽단보가 적로의 요충지인데, 만호의 관직이 낮고 군관이 적어서 형세가 약하다는 이유로 벽단에 첨절제사를 둘 것을 요청하였고 성종은 이를 받아들였다(『성종실록』 8년 11월 25일). 이로써 벽단은 첨절제사진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벽단첨사에게 중앙의 군직을 겸하게 하는 조치가 이어졌다(『성종실록』 8년 12월 20일). 벽단진첨절제사는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임명되었다. 1492년(성종 23) 성종은 벽단의 첨사를 중앙 오위(五衛) 가운데 중위(中衛)에 해당하는 의흥위(義興衛) 사용(司勇)에서 차출할 것을 병조에 지시했다(『성종실록』 23년 1월 12일). 그러나 오위의 사용은 9품직에 불과하므로 이는 오류일 것이다. 이 시기에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벽단진의 병마첨절제사가 종3품의 무관으로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1489년(성종 20)에는 평안도 지역의 성곽 시설을 보수하기 위해서 홍응(洪應)이 축성 도체찰사가 되었다. 이해 6월 복명한 홍응의 보고에 따르면 벽단의 백성들은 벽단진의 성이 좁고 물이 적으므로 이설(移設)할 것을 요청하였다. 홍응은 실제 조사를 통하여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행성의 공사가 끝나는 대로 옮길 계획임을 밝혔다(『성종실록』 20년 6월 18일).

그러나 벽단의 이설은 쉽게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1491년(성종 22) 여진족의 침입에 따라 파견된 입거체찰사(入居體察使)이철견(李鐵堅)은 벽단진의 성안에 물이 부족하여 유사시에는 길어다 써야 하는데, 적의 침입로와 가까워 매우 위태롭다고 보고하였다(『성종실록』 22년 4월 24일). 이해 벽단 일대에는 여진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벽단진의 이설 공역도 시작은 되었으나 찬반론이 거듭되었다(『성종실록』 23년 8월 7일). 벽단은 그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축성이 강행되고 이로 인해 의주의 공역도 중지할 정도였다. 벽단진의 이설 공역은 재정적인 문제로 해를 넘기도록 논란이 계속되었지만 그 중요성으로 인해 계속해서 진행되었다(『성종실록』 23년 9월 7일)(『성종실록』 24년 3월 14일). 벽단진의 이설 공역은 1494년(성종 25) 7월에 이르러 완료되었다(『성종실록』 25년 7월 30일).

벽단진은 16세기 말 건주여진의 흥기 이후로 강화된 평안도 방어체제와 관련되어 중시되었다. 광해군대 초반 평안도에 어사로 가서 진보(鎭堡) 현황을 검토하고 돌아온 최현(崔晛)의 『관서록(關西錄)』에 따르면 벽단진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반드시 지켜야 할 장소로 나타난다. 이때 최현은 또다시 벽단진을 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후면의 산성(山城)을 수축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이후 관련 논의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실행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 창성군의 창주진이 평안도병마절도사의 행영(行營)으로서 우선 수축되었던 데에 반해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

벽단진은 정묘호란 당시 후금(後金)의 군대에 의해 초토화되어 성안 건물의 전반이 전소(全燒)되기도 했다(『인조실록』 5년 10월 4일). 1644년(인조 22)의 기사에서 벽단진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묘호란 이후에 재건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강변의 성곽 개축이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탓에 이후 별다른 변화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벽단진에는 종3품의 첨절제사 외에 별장(別將) 1명, 병방군관(兵房軍官), 군기감관(軍器監官), 파수감관(把守監官)을 1명씩 두었고, 아전(衙前) 5명, 통인(通引) 3명, 사령(使令) 6명이 있었다. 군병은 장무군(壯武軍) 168명, 정초군(精抄軍) 183명, 성정군(城丁軍) 102명, 단속군(團束軍) 98명, 봉군(烽軍) 51명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위치 비정

벽단은 벽동군의 속진이다. 압록강에 설치된 의주·삭주·창성·벽동·이산·위원·강계 등을 ‘강변 7읍’이라 통칭한다. 벽단진은 한 차례 위치를 바꾸었는데, 조선 건국 초에 처음 설치된 ‘벽단구자’ 혹은 ‘벽단보’는 벽동군의 서쪽으로 대략 50리(약 19.6㎞)에 위치하여 창성군의 창주진과의 거리가 45리(약 17.7㎞)에 불과하다. 벽단진은 성종대에 새로이 축성을 하면서 위치를 옮겼고 이로써 벽동군으로부터 60리(약 23.6㎞) 정도 서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관련 기록

벽단진은 기록마다 그 규모를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벽동진은 석축의 둘레가 13,032자(약 3.6㎞), 높이가 5척(1.5m)이라고 한다. 또한 성안에 4개의 샘이 있고, 병마첨절제사영(兵馬僉節制使營)이 있었으며, 벽동군의 서쪽 51리(약 20㎞)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성종대에 새로이 설치한 벽단진을 의미한다. 실제로 고적(古蹟) 조에는 벽동군 서쪽 58리(약 22.8㎞)에 있는 둘레 1,754자(약 531.5m)의 석축으로 만든 고벽단성(古碧團城)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성종실록』에는 새로 축조한 벽단진성은 높이가 11자(약 3.3m), 둘레가 3,168자(약 960m)라고 하여 높이와 둘레 모두 큰 차이를 보인다(『성종실록』 25년 7월 30일).

17세기 초의 기록인 최현의 『관서록』에 따르면 벽단진은 둘레가 3,530자(약 1069.7m)라고 한다. 최현의 기록에 나타난 벽단진은 성종대에 새로 쌓은 벽단진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는 대략 380자(약 106.1m)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세기 초에 작성된 『만기요람』「군정편」의 관방(關防) 조를 확인하면 벽단진은 석축의 둘레가 1,754자로 나타난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옛 벽단진성과 둘레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새로 쌓은 벽단진을 뜻하지는 않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18세기 말 이래로 변방의 방어가 긴요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 실태 파악에도 미진했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관서록(關西錄)』「인재집(訒齋集)」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벽동군지(碧潼郡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사단법인 평화문제연구소 편, 『조선향토대백과』5권(평안북도Ⅰ), 사단법인 평화문제연구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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