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전원(小田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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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세 시기 상모국 족병하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번(藩)의 명칭이자 해당 지역.

개설

1590년 풍신수길(豊臣秀吉)이 후북조씨(後北條氏)를 멸망시킨 후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덕천가강은 자신의 부하인 대구보씨(大久保氏)에게 소전원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고, 강호시대 동안 이 지역의 번주를 계승하였다. 1590년 조선의 통신사(경인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였을 당시 풍신수길이 이 지역을 공격하기 위하여 경도(京都)를 떠나 있었기에 통신사 일행은 오랜 시간 대기해야 했다. 소전원은 조선후기의 통신사는 강호(江戶)까지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쳤던 기착지이기도 하였다.

명칭 유래

작은[小] 밭[田]이 연이어 있는 들[原]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자연 환경

동쪽에는 홍적층(洪積層)으로 덮여 있는 대기구릉(大磯丘陵), 중앙에는 주내천(酒匂川)과 수야천(狩野川)의 범람원(氾濫原)으로 선상지성(扇狀地性)의 삼각주가 있다.

형성 및 변천

평안(平安)시대 말기에는 대정(大井) 장원·조천(早川) 장원이 성립되었으며, 1416년 상삼선수(上杉禪秀)의 난 때 대삼뢰현(大森賴顯)이 소전원으로 들어왔고, 그 아들이 서상모(西相模)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전국시대에는 후북조씨가 지배하면서 소전원성을 축성하고 5대에 걸쳐 번성하였으나, 풍신수길의 공격에 의하여 가문이 멸망당하였다. 강호시대에는 소전원번(小田原藩)의 번청(藩廳)이 설치되었다. 1590년 관동(關東)으로 들어온 덕천가강이 대구보충세(大久保忠世)를 소전원의 성주(城主)로 삼았다. 1871년 부현(府縣) 제도가 개정될 때까지 대구보씨가 지배하였다.

위치 비정

동쪽은 중군(中郡), 북쪽은 족병상군(足柄上郡)·남족병시(南足柄市), 남서쪽은 족병하군(足柄下郡)에 접하며, 남동쪽은 상모만(相模灣)에 면하고 있다.

관련 기록

1705년(숙종 31) 일본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의진(宗義眞)이 죽고 그 아들 의방(義方)이 그 뒤를 이어받게 되어 조선에서 역관(譯官) 2명을 보내 위문하게 하였다. 이들이 돌아와 보고한 내용에 1703년(숙종 29) 11월 21일 일본 동해도(東海道) 15주(州) 안의 상모(相模) 등 6개 주에 한꺼번에 지진이 났는데, 그 중 강호 무장주(武藏州)의 관백(關白)이 거주하는 지역 및 상모주 소전원의 지역이 더욱 심하여 땅의 갈라진 너비가 한 자도 넘고 그 깊이는 측량할 수 없었으며 깔려서 죽거나 빠져서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는 내용이 있다(『숙종실록』 31년 2월 18일).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辭典典』, 吉川弘文館, 1999.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ー,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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