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견(石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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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도근현(島根縣) 서쪽 지역을 일컫던 옛 지명.

개설

내랑(奈郞)시대부터 명치(明治)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지리 구분의 기본단위였던 국(國)으로, 5기7도(五畿七道) 가운데 하나인 산음도(山陰道)에 있었던 국이다. 겸창(鎌倉)시대는 좌좌목씨(佐佐木氏)가 군사와 민정을 감독하는 직책인 수호(守護)가 되었고, 실정(室町)시대에는 대내씨(大內氏)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1556년 이후에는 모리씨(毛利氏)가 관할하였다. 강호(江戶)시대는 세 지역으로 분할되어다가 1871년에 명치(明治) 신정부에서 번(藩)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시행하면서 빈전현(濱田縣)이 되었다. 1876에 도근현의 서쪽에 있었으며, 석주(石州)라고도 불렀다.

명칭 유래

석해(石海)·석만(石滿)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산지가 대부분이었기에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연 환경

우리나라의 동해와 일본 중국산지(中國山地) 사이에 낀 좁고 긴 지형으로 대부분이 산지이며, 강천(江川)·고진천(高津川) 등 여러 개의 하천이 동해 쪽으로 흐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646년 일본에서 조정 안의 혁신파가 벌인 대규모 정치 개혁인 대화개신(大化改新)이후 5개의 군(郡)이 설치되었다. 1193년에 좌좌목정강(佐佐木定綱)이 군사와 민정을 감독하는 직책인 수호(守護)로 처음 석견국에 부임하였다. 남북조(南北朝)시대에는 영지(領地)를 소유한 여러 영주(領主) 사이에 싸움이 빈번하게 발생하였으나 1364년 대내홍세(大內弘世)가 수호가 되면서 평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25년(세종 30)에 무릉도(茂陵島: 울릉도의 별칭)에 들어갈 때 바람으로 평해(平海) 사람 장을부(張乙夫)가 석견 지역에 표류하였다가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돌아온 사례가 실려 있다(『세종실록』 7년 12월 28일). 또 1426년(세종 8)부터 1502년(연산 8)까지 석견국이 조선에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세종실록』 8년 11월 28일)(『연산군일기』 8년 8월 15일). 전국(戰國)시대에는 본격적으로 은광 개발이 이루어졌고 이후 강호막부(江戶幕府)가 직접 관할하는 지역이 되었다.

17세기 전반에 가장 번성하였다. 1869년 은광이 있는 빈전번은 은기현(隠岐縣)과 함께 대삼현(大森縣)이 되었다가 이듬해 빈전현으로 개칭되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진화야번(津和野藩)이 편입되었고 머지않아 은기가 이관되어 석견 일대가 빈전현이 되었다. 1876년에 빈전현은 도근현에 편입되었다.

위치 비정

현재 도근현의 은기제도(隱岐諸島)를 제외한 서쪽 지역으로, 동쪽은 출운국(出雲國)·비후국(備後國), 남쪽은 안예국(安藝國)·주방국(周防國), 서쪽은 장문국(長門國)과 접해 있었으며, 북쪽은 우리나라의 동해와 면해 있다.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三省堂編修所, 『日本地名事典』, 三省堂, 2007.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