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마도(征對馬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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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년(세종 1) 조선이 왜구를 근절하기 위해 17,000명의 병력으로 대마도를 공격하여 상당한 타격을 가한 사건.

개설

한국 기록에는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하며, 일본 기록에는 응영외구(應永外寇)라고 한다. 1419년(세종 1) 상왕 태종의 강력한 의지로 결행된 기해동정 이전에도 1389년(고려 우왕 1)에 경상도도원수박위(朴葳)가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일본 선박 300척을 소각하는 등 전공을 올린 바 있다. 1397년(태조 5) 문하정승김사형(金士衡)이 5도의 병선을 이끌고 일기(一岐)·대마(對馬) 두 섬을 정토하기 위해 떠났으나 조선에 항복하여 귀화한 일본인이 속출하여 대마도로 가지 못하고 철수한 적도 있다.

역사적 배경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 해적집단’을 총칭한다. 왜구가 대규모로 발생한 것은 1350년(고려 충정왕 2) 2월 경상도 고성·죽림·거제를 습격한 이후이다. 그 이전의 왜구는 한반도 남쪽 일대에 나타나 노략질을 하였으나, 1350년 경인년 이후로 왜구의 침략 범위가 매우 넓어져서 개경 근처까지 출몰하였고 이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내륙 깊숙이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납치하고 물자를 약탈해 갔다. 수도 개경을 공격하려는 시도까지 있어 고려 조정은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왜구의 피해가 고려가 멸망하는 원인의 하나로도 지목되기도 하지만, 고려도 방어 대책을 마련해 나갔다. 고려는 화포를 개발하여 진포해전(鎭浦海戰)에서 500여 척의 왜선을 격침하였고 1383년(고려 우왕 9) 남해(南海) 전투에서 성과를 올렸으며 1389년(고려 창왕 1) 박위로 하여금 대마도 정벌에 나서게 하여, 왜구 침구 횟수는 줄어들게 되었다.

고려 말 왜구 토벌에 큰 성과를 낸 태조이성계는 회유와 통교 장려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왜구 대책을 세웠다. 일정하게 경제적인 이득을 주거나 무역을 허락함으로써 투항을 재촉하며 귀순한 자에게 조선의 관직을 주기도 하였다. 평화로운 교역자로서 조선에 건너오게 하여 일본 내 각 세력에게 사신이라는 명분으로 내조를 허락하였다. 특히 해적의 근거지로서 지목되는 대마도의 지리적 위치에 주목해서 그 도주인 종정무(宗貞茂)를 이용하여 도항자들을 통제하도록 해서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다. 한편으로 연안 방비를 위해서 수군을 정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발단

1418년(세종 즉위) 봄 도주 종정무가 죽고 정성(貞盛)이 어린 나이로 도주직을 승계하였다. 조선 기록에 도도웅와(都都熊瓦)로 나오는 인물이 바로 도도웅환(都都熊丸, [도도쿠마마루])인데, 나이가 어려 실권은 조전(早田)에게 쥐어졌다. 조전좌위문태랑(早田左衛門太郞)은 본래 해적의 수령이었다. 대마도 내의 통제가 느슨해졌고, 마침 찾아온 기근 때문에 도내 해적이 대거 명나라로 향하였고 중도에 조선의 연안에 접근하여 식량을 요구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다가 달아났다. 이것이 1419년 태종이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게 되는 직접적 이유이다. 조선 정부는 갑자기 충청도비인현 도두음곶(都豆音串)과 황해도 해주 연평곶(延平串)에서 왜구의 침략을 받고 대마도 내의 해적이 중국으로 약탈을 위해 출동한 틈을 이용하여 대마도의 근거지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세종실록』 1년 5월 13일). 대마도 정벌이 단행된 때는 1418년 태종이 병권을 가진 채 상왕으로 물러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즉위시킨 이듬해였다. 이때 좌의정 박은(朴誾)·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은 태종의 뜻에 찬성했으나 세종은 각 포구의 병선이 부족하니 육상 방어에 치중할 것을 주장하였고, 우의정이원(李原)·예조 판서허조(許稠)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태종은 단호하게 대마도 정벌을 명령하고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 유정현(柳廷顯)을 삼도도체찰사로 임명하였다. 원정에 앞서 도주 소 사다모리에게 정벌에 나서는 이유를 알리고 죽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성의를 다하도록 설득하는 글을 보냈다.


경과

1419년 6월 9일 태종은 중외에 정벌에 나서는 대의를 포고하였다. 6월 12일 제군은 경상도 창원군 내이포(乃而浦)를 출발하여 19일에 거제도에서 출정하여 대마도로 향했다. 병선 227척에 17,285명의 병력이었고 65일분의 식량을 갖추었다(『세종실록』 1년 6월 17일). 조선 원정군은 다음 날인 20일에 대마도 남단 아소(淺茅)만에 입항하여 미기(오자키, [尾崎])의 두지포(豆地浦, [츠치요리])에 정박하였다. 사다모리에게서 답서가 오지 않자 도내를 수색하여 가옥을 태우고 목을 베거나 생포한 자가 130여 명이고 적선 129척을 불태웠다. 원정군은 선박 왕래의 요충지인 훈내곶(訓乃串, [후나코시])에 목책을 쌓고 도내에 식량이 충분하지 않다는 정보에 따라 오래 작전을 치를 태세를 취했다. 26일에 원정군은 니로군(尼老郡)에 상륙했지만 박실(朴實)의 좌군이 복병을 만나 패전하였고 이순몽(李順蒙)의 우군도 적을 만나 응전하였다. 하지만 중군은 하륙하지 않았다. 쓰시마에서는 지명을 따서 강악([누카다케], 糠岳) 전투로 부른다고 한다. 오래 있을 것을 우려한 도주 사다모리가 7월에 폭풍이 올 것을 조선군에 경고해 오자, 조선군은 대마도에서 철군하여 7월 3일 거제도로 귀환하였다.

당시 일본 내 사정은 6월 말부터 교토 방면에서 중국이 봉기한다든가 또는 이국이 습격해 온다든가 몽고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아서 원정 1개월여까지 큐슈의 소이([쇼니], 少貳)씨에게 전달되었으나 구주탐제(九州探題)와 소이씨가 반목하고 있어서 쓰시마 응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원정 이후에도 재차 원정 논의가 있었으나 중국 방면으로 갔던 해적단이 명 연해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시행되지 않았다(『세종실록』 1년 7월 12일). 이해 7월 하순 병조에서 건의하여 9~10월 중에 다시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병선을 정비해야 한다는 것으로 상왕의 허락을 받기도 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역으로 9월 초순 쓰시마 쪽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중국 사람을 조선으로 보내 9~10월간에 조선을 칠 것이라는 허위 정보를 흘리기도 하였다.

조선은 재차 원정을 중단하고 도주 사다모리에게 쓰시마가 본래 경상도 계림의 땅이었음을 천명하고 항복을 권고하였다. 일시 쓰시마를 경상도의 속주로 하고 조선의 관직을 주었다. 1419년 11월 큐슈탄타이의 요청에 따라, 대장경을 달라고 하는 핑계로 조선의 내막을 알기 위해 승려 양예(亮倪, [료게]) 일행이 조선에 왔다(『세종실록』 1년 12월 17일). 이듬해인 1420년 조선은 답례의 뜻으로 보빙사송희경(宋希璟)을 일본으로 보내서 대마도에서 실권자 조전(早田, [소다])을 만나고 박다(博多, [하카타])에서 구주탐제와 접촉하였고 경도에서 족리(足利, [아시카가]) 정권과 교섭하였다. 송희경이 사행 도중 냉대를 받기도 하였고, 두 나라 사이의 긴장 관계는 대일강경론을 견지했던 태종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대마도 도내에서도 도주 사다모리의 통제가 확립되면서 대조선통교에서 독자적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

참고문헌

  • 국방군사연구소, 『왜구토벌사』, 1993.
  • 한일관계사학회, 『독도와 대마도』, 지성의 샘, 1996.
  •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 지음, 손승철·김강일 편역, 『동아시아속의 중세한국과 일본』, 경인문화사, 2008.
  • 田中健夫, 『倭寇(海の歴史)』, 敎育社(ニュートンプレス), 1982(1997).
  • 中村榮孝, 「朝鮮世宗己亥の對馬征伐―應永の外寇朝鮮から見る―」, 『日鮮關係史硏究』上, 吉川弘文館,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