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출성(南漢出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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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농성 중이던 조선의 왕 인조가 항전을 포기하고 성을 나와 청 태종에게 직접 항복한 사건.

개설

명나라에 대한 총공격을 앞두고 배후의 조선을 확실하게 제어할 목적으로 청나라가 1636년(인조 14) 겨울에 조선으로 침입해 들어옴으로써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조선 조정은 유사시에 정묘호란 때와 마찬가지로 강화도로 피신해 항전하며 강화교섭을 할 계획을 세웠으나, 청군(淸軍) 선발대가 급속히 남하해 한양을 압박한 탓에 왕과 조정은 미처 강화도로 피난하지 못한 채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45일에 걸쳐 항전과 교섭을 병행했다. 그러나 청군에 포위되어 고립된 채 추위와 식량난 등이 겹치자 시간이 갈수록 척화파의 주장이 위축되고 주화파의 주장이 힘을 얻었다. 이러던 차에 강화도로 피신했던 조정관료와 봉림대군 등이 항복했다는 강화도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마침내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직접 항복의식을 거행했다.

역사적 배경

조선왕조에서 남한산성은 강화도와 함께 한양 방위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초기의 경험을 통해 1595년(선조 28)에 성곽을 쌓아 처음으로 남한산성을 축조했다. 그 후로 후금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개축을 거듭해, 1626년(인조 4)에는 남한산성을 요새화하고 수어청(守禦廳)의 본영을 이곳에 두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유사시에 국왕과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남한산성에서는 한양을 엄호하고 적의 배후를 견제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때 이런 계획이 잘 들어맞아, 조선은 후금과 비교적 수월하게 강화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의 이런 계획을 간파한 청나라는 병자호란 때에는 조선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발대를 급속히 남하시켜,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했다. 이로 인해 조선 왕과 조정은 차선책으로 남한산성으로 피난해 농성에 들어갔다.

발단

병자호란 발발로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들어갔을 때 성안의 군사는 경기도 소속 군사 및 인조를 따라 입성한 경군(京軍)을 합쳐 도합 13,800명 정도였다. 이 밖에 문무신료와 서리 및 노복 등이 도합 1,000여 명이었다. 당시 산성에는 쌀과 콩 종류의 하나인 태두(太豆)가 10,800여 석, 정미하지 않은 겉곡식이 5,800여 석, 맛이 단 감장(甘醬) 200여 석, 소금 90여 석 등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이런 정도의 식량은 성안 사람들이 아무리 아껴 먹더라도 두 달을 넘길 수 없는 양이었다. 또한 농성 초기에 이미 남한산성은 청군이 동서남북으로 완전히 포위하여 외부와의 교통조차 거의 불가능했고, 팔도의 근왕병(勤王兵) 가운데 어느 부대도 남한산성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물러나거나 청군에 패해 퇴각했다. 이런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성안에서는 입성 직후부터 강화 논의가 시작되었다.

경과

청군은 남한산성의 상황을 곧 간파했고,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소규모 공격으로 조선의 방어태세를 탐지하면서 항복을 요구했다. 조선군은 농성 초기에는 소규모 전투에서 일부 승리를 거둠으로써 사기를 진작하였으나, 12월 29일에 출성한 조선군 300여 명이 적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다시피 하여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이후로는 감히 출성해 교전하지 못했다. 그 대신 몇 차례 대공세를 취해 온 청군을 분전해서 격퇴하곤 했다.

농성 중의 주요 사안은 전투 자체보다는 양국 사이의 강화협상이었다. 농성 초기에 청의 장수 마부대(馬夫臺)와 조선의 최명길(崔鳴吉) 사이에 협상이 있었다. 청나라는 이때 왕의 형제나 왕자, 더 나아가 세자를 인질로 요구했고, 조선이 이를 거절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후에 청나라는 인질 대상에서 세자를 빼고 제안했으나,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파가 세력이 강하여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청 태종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전도에 도착한 12월 30일을 고비로 강화의 조건은 조선에 더욱 불리해졌다. 청 태종이 남한산성 아래 삼전도까지 직접 온 이상, 강화를 하기 위해서는 조선에서도 국왕이 직접 성을 나가 어떤 식으로든 청 태종과 대면해야 할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청 태종이 국서를 보내 조선을 질책하고 성을 나와 항복할 것을 요구할 때마다 조선 측에서는 항복은 하되 조선 국왕이 성을 나가지는 않겠다고 버텼다. 대신 성의 망루에서 청 황제를 전송하겠노라고 했으나,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추위가 더 심해지고 식량도 바닥나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된 상태에서 조선 조정으로서는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길 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어지자, 점차 주화파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강화도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성안에 있던 문무백관 대다수도 가족들의 생사문제로 인해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막다른 길에 몰린 조선 조정은 강도함몰을 구실로 삼아 26일 밤에 국왕의 출성항복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일부 척화파 신하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이미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듬해 1월 30일에 인조는 군복의 하나인 융복(戎服)을 입고 걸어서 성의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수차례 올리면서 항복의식을 거행했다. 이는 청나라에서 신하가 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방식이었다. 이로써 이른바 정축화약(丁丑和約)이 체결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조선 국왕이 명나라로부터 받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청 황제에게 바치고 완전한 군신관계를 맺을 것, 소현세자 이하 왕자와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보낼 것, 청의 명나라 공격을 도울 것 등이었다. 후에 청 태종의 명령에 따라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세웠다.

참고문헌

  • 『남한일기(南漢日記)』
  •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 『병자록(丙子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
  • 김종원, 『근세 동아시아관계사 연구』, 혜안, 1999.
  • 류재성, 『병자호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6.
  •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사 29: 조선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국사편찬위원회, 1995.
  • 이현희, 「남한산성의 축성」, 『동국사학』, 동국사학회, 1999.
  • 허태구, 「병자호란 강화 협상의 추이와 조선의 대응」, 『조선시대사학보』52, 조선시대사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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