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지전(蔚山之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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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울산 지역에서 벌인 전투.

개설

1597년(선조 30) 9월 조명연합군에게 충청도 천안의 직산 전투에서 패한 후 일본군은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이동하여 왜성을 축조하여 장기 주둔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조명연합군은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 주둔 중인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대를 두 차례에 걸쳐 공격하였다. 1597년 12월 22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벌어진 1차 전투는 조명연합군의 일방적 철수로 실패했다. 1598년 9월 22일부터 10월 4일까지 벌어진 2차 전투 역시 일본군의 구원군이 당도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조명연합군의 퇴각으로 도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에 상당한 타격을 입고 가등청정은 도산성, 소서행장(小西行長)은 순천성(順天城), 흑전장정(黑田長政)은 양산성(梁山城)을 버리고, 가등청정은 서생포(西生浦), 소서행장은 사천(泗川), 흑전장정은 가덕도(加德島) 등으로 후퇴했다. 이후 일본군은 더 이상의 북상 계획을 포기하였다.

울산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 못한 것이 발단이 되어 명의 경리(經理)양호(楊鎬)는 정응태(丁應泰)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역사적 배경

명과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풍신수길(豊臣秀吉)은 다시 조선 침략을 감행하여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강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은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 수축 등의 군비 확충, 명의 절강병법(浙江兵法) 도입, 훈련도감(訓鍊都監)과 속오군(束伍軍)의 설치, 전면전에 유리한 진관체제로의 방어체제 전환, 군량미 확보 등을 통해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때문에 정유재란 때 일본군은 북상에 한계를 겪었으며, 직산 전투와 명량해전에서 패한 후 울산·기장·남해·순천 등 남해 연안의 왜성(倭城)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수세로 돌아서자 1597년 11월 명의 양호는 울산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12월 4일 제독마귀(麻貴)가 거느린 명군이 출발했고, 이어 8일까지 36,000여 명의 명군이 울산성으로 진군하였다. 권율 등이 이끄는 조선군 11,500명도 합세하여 공격에 가담했다.

발단

울산 지역의 일본군은 울산 동쪽에 있는 도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도산성은 가등청정이 축조한 울산왜성을 가리키는데 조선인들은 이 성이 섬처럼 생겼다고 해서 도산성(島山城)이라고 불렀다.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던 가등청정은 조명연합군이 남하하자 도산성으로 옮겨 일본군의 방어거점으로 삼았다.

1597년 12월 20일 조명연합군은 경주에 이르렀다. 조명연합군은 공격에 앞서 항복한 일본군, 즉 항왜(降倭) 여여문(呂汝文)을 도산성에 잠입시켜 일본군의 배치도를 그려오게 했고, 이를 토대로 도산성을 공격하였다.

12월 22일 도산성에서 30리가량 떨어진 농소(農所)에서 명의 장수 이여매(李如梅)가 선봉에 서고 파새(擺賽)와 양등산(楊登山)이 서로 협공하여 일본군 400여 명의 머리를 베는 승리를 거두었다(『선조실록』 31년 6월 23일). 23일에도 파새·마귀·이여매가 거느린 명군은 도산성 서북쪽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도산성 안으로 퇴각시켰다. 이와는 별도로 양호가 거느린 군사는 도산의 외성인 목책을 점령하였다. 24일 서생포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이 고립된 도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20~30여 척의 배로 도산성 주변에 접근했다. 태화강(太和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은 일정한 타격을 입고 염포(鹽浦)로 돌아갔다. 25일 다시 일본의 수군이 접근해 왔지만 역시 명군의 방어선에 막혀 되돌아갔다. 26일부터 조명연합군은 도산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은 성을 지키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성내에 있던 일본군은 군량과 식수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의 구원군은 수륙 양면으로 도산성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었다. 조명연합군은 일본의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 전투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에 1598년 1월 4일 총공세를 가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양호는 일본의 구원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하여 조명연합군을 경주로 철수시켰다. 도산성을 두고 벌어진 이 전투는 일본군 전사자 1,200여 명에 부상자 수천 명, 명군 전사자 1,000여 명에 부상자 3천여 명, 조선군 전사자 300여 명에 부상자 9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치열하였다.

경과

도산성 공격에 실패한 조명연합군은 병력을 경상좌도·경상우도·전라도에 배치하였다. 또 진린(陳璘)이 거느린 명의 수군을 보내 조선 수군과 협력하여 일본 수군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울산·사천·순천 지역의 일본군을 동시에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1598년 9월 11일 명의 부총병(副摠兵)해생(解生)은 4,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산성에 접근하여 일본군 1,000여 명을 격파하고 도산성 주변에 있는 학산성(鶴城山)을 점령하였다. 한편 김응서(金應瑞)가 지휘한 조선군은 동래 지역의 일본군을 물리치고 부산과 울산을 연결하는 통로를 점령하였다.

9월 21일 마귀는 20,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울산에 도착했고, 이튿날부터 도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23일 울산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일본군들이 성안으로 들어갔다는 승전보를 받았다(『선조실록』 30년 12월 28일). 하지만 조선 조정은 1598년 1월 1일 조명연합군이 고전하고 있다는 내용을, 4일에는 철수하여 경주로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즉 전쟁 초반에는 조명연합군이 우세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결국 포위를 풀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을 성 밖으로 유인하려 했지만, 일본군은 성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일이 지나면서 일본의 구원병이 당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조명연합군은 다시 경주를 거쳐 영천으로 이동하였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온창일, 『한민족전쟁사』, 집문당, 2008.
  • 류재성, 『한민족전쟁사』Ⅲ, 국방부군사연구소, 1996.
  • 이형석, 『임진전란사』중, 신현실사, 1977.
  • 케이넨 저, 나이또오 순뽀 교주, 신용태 역주, 『임진왜란종군기』, 경서원, 1997.
  • 최효식, 「임란시 조·일강화교섭과 울산항쟁」, 『동국사학』37, 동국사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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