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직재사(金直哉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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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년(광해군 4) 김직재가 아들 김백함과 함께 역모를 일으켰다는 사건.

역사적 배경

광해군 때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북파가 소북파 잔당을 제거하려고 일으킨 무고한 옥사로, 출세욕에 눈이 어두운 신율(申慄)이 조작하고 대사간이이첨·유인길(柳寅吉) 등 대북파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불우하고 불평이 많던 김직재(金直哉)의 일족을 희생양으로 삼아 소북파를 제거하려고 꾸민 사건이었다. 광해군대 대북파가 공안 정국을 형성하여 권력을 확고히 하려는 상황에서 나온 옥사로 평가를 받고 있다.

발단

1612년(광해군 4) 2월 황해도 봉산군수 신율이 어보(御寶)와 관인을 위조해 군역을 피하려고 했던 김경립(金景立, 일명 金濟世)을 체포한 뒤, 그를 협박하여 김백함 등의 역모 혐의를 고변하게 한 데서 발단이 되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4년 2월 13일)

경과

김경립은 국문 과정에서 신율의 협박과 회유, 그리고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김직재가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무고하였다. 김경립은 "팔도에 대장과 별장을 정하고 무리가 모이기를 기다려 불시에 서울을 범한다."는 식의 내용을 무고하였다. 여기서 말한 팔도의 대장이 바로 김백함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신(皇甫信) 및 일족이 모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취조 과정에서 유팽석(柳彭錫)의 공초에 대북의 영수인 우찬성정인홍의 이름이 나왔으나, 정인홍을 끌어댔다는 김백함이 그 사실을 부인하면서 불문에 부쳐졌다. 광해군이 서청(西廳)에서 직접 취조를 할 만큼 왕이 큰 관심을 가진 역모 사건이었다. 김백함은 모역에 대해 극구 부인하다가, 끝내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이 역모 모의의 주동자라는 허위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들이 추대하려는 왕이 선조의 여섯째 왕자인 순화군(順和君)의 양자인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이라고 하였으며,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결국 김직재·김백함 부자는 사지를 수레에 매달아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형되고, 김척(金滌)·유팽석·김일승(金日昇)·정몽민(丁蒙民) 등은 심문중 사망했다. 김직재의 형제와 친척들은 정여립 사건의 예에 의거하여 가산이 모두 몰수되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지두환, 『광해군과 친인척 - 조선의 왕실 15-1 군과 부인』, 역사문화, 2002.
  • 오이환, 「대북정권 시기의 정인홍」, 『한국사상사학』30, 2008.
  • 차인배, 「광해군 전반 역옥 사건과 포도청의 활동」, 『백산학보』81,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