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축지옥(癸丑之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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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년(광해군 5) 3월, 문경새재에서 발생한 은상 살해 사건의 조사 도중 영창대군과 그 보호 세력을 제거하는 계기로 확대된 옥사.

개설

1613년 3월, 문경새재에서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洋甲) 등 일곱 명의 서얼[七庶]이 주동한 도적의 무리가 은상(銀商)을 살해한 단순 강도 사건이 발각되었다. 대북파의 사주와 협박으로 인해, 박응서와 서양갑이 자신들은 사실 역모 사건을 도모한 것이며 그 배후가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라고 거짓 자복함에 따라 큰 옥사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서양갑을 비롯한 서얼과 연루자들이 처형당하였다. 유교칠신(遺敎七臣)을 비롯하여, 연루자들의 심문 과정에서 그 이름이 언급된 수십 명의 서인들도 고초를 겪었다. 김제남이 사사되었으며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로 유배당하였다가 다음 해에 살해당하였다. 이 옥사가 계축년(癸丑年)에 일어났으므로 계축지옥(癸丑之獄)이라고 한다.

역사적 배경

선조의 후사(後嗣)를 놓고 대립한 두 세력은 모두 북인(北人) 내의 계열이었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柳永慶) 일파는 소북(小北)에서 분화된 무리였고, 광해군을 지지한 세력은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한 대북(大北)이 중심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우선 유영경 일파인 유당(柳黨)을 축출하였으며, 곧이어 임해군 옥사(獄事)를 통해 영창대군과 연결 가능성이 있는 소북 세력을 제거하면서도 재위 초기에는, 원활한 정국의 운영을 위하여 외척인 유희분(柳希奮)을 중심으로 한 소북, 이항복(李恒福)을 중심으로 한 서인(西人), 이원익(李元翼)으로 대표되는 남인(南人)도 포함하는 연합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1611년(광해군 3) 3월 대북의 영수 정인홍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배척하고 이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가 부당하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림으로써 대북과 여타 정파와의 정치적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3년 3월 26일). 이후 대북은 더욱 강력하게 인사권을 장악하고 상대 정파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려 하였다. 1612년(광해군 4) 2월에는 순화군(順和君)의 양자인 진릉군(晋陵君) 이태경(李泰景)을 왕으로 추대하고 대북 세력을 몰아내려고 모의했다는 김직재(金直哉)의 허위 자백이 나왔다. 이와 관련된 옥사로 인하여 소북의 잔여 세력이 대거 축출되는 등 정국의 경색은 갈수록 심해졌다. 한편, 광해군과 대북 세력에게 선왕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의 존재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발단

김직재의 역모 사건이 종결되기 전인 1613년(광해군 5) 4월 문경의 새재[鳥嶺]에서 한 무리의 도적이 은상을 살해하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해 도망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허홍인(許弘仁)의 노비 덕남(德男) 등이 체포되어 자백함으로써, 도적떼의 전모가 밝혀졌다.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의 서자(庶子) 박응서, 평난공신(平難功臣) 박충간(朴忠侃)의 서자 박치의(朴致毅), 박유량(朴有良)의 서자 박치인(朴致仁), 목사를 지낸 서익(徐益)의 서자 서양갑, 관찰사를 지낸 심전(沈銓)의 서자 심우영(沈友英),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李濟臣)의 서자 이경준(李耕俊), 서얼 허홍인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이름난 가문의 자제들이었는데, 박응서 등은 허균(許筠)·이사호(李士浩)·이재영(李再榮)의 무리와 글을 짓거나 병서(兵書)를 읽으며 교유하였다. 1608년에는 서양갑·심우영·이경준이 김경손(金慶孫) 등과 연명하여 서얼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 한 서얼금고(庶孼禁錮)의 폐지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김경손은 김장생(金長生)의 서제(庶弟)였다. 이들은 연명상소가 거부당하자, 1613년 초부터 생사를 같이하는 도당(徒黨)을 결성하였다. 경기도 여주의 남한강변에 무륜당(無倫堂)이란 집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병란을 대비하여 곡식을 저장하는 등 기이한 행동을 하였다. 시를 짓고 술 마시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스스로를 죽림칠현(竹林七賢) 또는 강변칠우(江邊七友)라 일컬었으나, 실제로는 나무꾼·소금장수·노비추쇄꾼으로 위장해 전국에 출몰하면서 화적질을 일삼았다.

은상 살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후 박응서만이 홀로 집에 있다가 체포되었다. 사형을 앞둔 그는 자신들의 살인이 단순한 강도 행위가 아니라 역모 자금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고 고변(告變)하였다. 그런데 이 고변이 실은 대북파 이이첨 등의 사주에 의하여 포도대장한희길(韓希吉)이 박응서를 꼬드겨 받아낸 허위 진술이라는 기록도 전한다(『광해군일기(중초본)』 5년 4월 25일). 광해군의 친국(親鞫) 과정에서 박응서는 자신들의 무리가 수년 전부터 역모를 도모하여 1609년(광해군 1)에는 선조의 조문(弔問)을 하러 온 명의 사신을 공격한 뒤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며, 1612년(광해군 4)에는 사대문(四大門)에 격문을 붙인 뒤 거병하려 하였으나 김직재의 옥사가 발생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이어서, 은상 살해 사건은 무사(武士)들의 동원 자금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최근의 계획은 집정자(執政者)에게 뇌물을 주어 선전관(宣傳官)·내금위(內禁衛)·수문장(守門將) 등의 관직을 얻는 한편 역모 주모자 중의 하나인 정협(鄭浹)을 훈련대장(訓鍊大將)으로 임명한 뒤에 매수한 3백 명을 동원하여 대궐을 습격하는 것이었다고 진술하였다. 마지막으로, 역모가 성공하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수렴청정을 실시한 뒤 조정을 장악하려고 했다고 말하였다. 박응서가 수괴(首魁)로 지목한 서양갑은 처음에는 완강히 혐의를 부인하다가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박응서가 언급한 집정자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었고, 바로 그가 역모를 처음 발의한 자였다고 거짓 자복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5년 5월 6일).

경과

이후 역모의 수괴인 서양갑을 필두로 다수의 서얼들이 처형되었으나, 박치의만은 옥사 발생 이후 완전히 잠적하여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고변자 박응서는 죄를 사면 받았으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종성판관(鐘城判官) 정협을 비롯한 많은 연루자들도 죽거나 유배당하였다.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호를 당부 받은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 등의 유교칠신도 많은 고초를 겪었다. 정협의 심문 과정에서 이름이 거명된 이정구(李廷龜)·김상용(金尙容) 등의 서인 수십 명도 일의 내막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여 지정자(知情者)로 몰려 옥에 갇히게 됨으로써 조정 내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고 박동량의 심문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선조의 병환을 치유한다는 명분으로 광해군을 아들로 삼았던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유릉(裕陵)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하게 했다는 사실도 새로이 드러났다. 결국 김제남은 사사(賜死)되었고, 영창대군 역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다음해 2월 강화부사(江華府使)정항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6년 2월 10일). 영창대군의 처벌을 반대한 영의정이덕형(李德馨), 좌의정이항복(李恒福) 등은 토역(討逆)의 명분을 앞세운 대북파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이 옥사를 계기로, 인목대비의 입지 또한 크게 축소되어 폐모론(廢母論)이 대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대북파의 독단적 정국 운영은 더욱 심화되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명기, 『광해군』, 역사비평사, 2000.
  • 한명기, 「광해군대의 대북(大北) 세력과 정국의 동향」, 『한국사론』20,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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