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애란(李施愛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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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년(세조 13) 5월 세조의 중앙 집권 정책에 반대하여 회령부사였던 이시애가 중심이 되어 함경도(당시 함길도)에서 일으킨 난.

개설

일찍이 회령 대도호부의 절제사를 지낸 이시애가 동생 이시합과 함께 함경도 토호들과 손을 잡고 세조의 중앙 집권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이시애가 거사하자마자 10여 일 안에 함경도 21개 군현 가운데에서 남부 7개의 군현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지방관들이 살해되었다.

이시애의 난은 부하의 밀고로 그가 잡혀서 죽임을 당하기까지 3개월 이상 진행되었다. 이 난은 함경도 농민군이 2만 명이었고, 진압하러 온 관군이 4만 명 정도나 될 정도로 큰 규모의 전쟁이었다.

역사적 배경

세조의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은 이시애 난의 발생 원인이 되었다. 세조는 호적을 개정하고 성명·출생·신분·거주지 등을 명기한 호패제도(號牌制度)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또 현직 관리에게 재직 기간 동안만 토지를 지급케 하는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지주들의 대토지 소유를 경계하고 국가의 경제력 강화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그동안 기득권을 누려 왔던 계층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또 함경도 지방에 파견된 지방 관리들의 부패와 탐학도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절제사로 온 강효문은 부정부패를 극심하게 자행하여 함경도민들을 자극하였다. 이 외에도 국경 지대를 방어하기 위해 출동하는 부방(赴防), 서울로 오는 야인(野人), 즉 여진족을 맞아들이고 보내는 영송(迎送), 해동청(海東靑)·은(銀) 등 특산물의 공납 등에서 벌어지는 불법적인 수탈은 주민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조선초기부터 충청도·경상도·전라도 등 삼남(三南) 지역의 주민들을 변방의 빈 땅에다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으로 인해 강제로 함경도에 이주한 사람들의 불만도 높았다.

발단

이시애는 거사를 일으키기 3년 전부터 모반의 뜻을 키워 왔다. 그는 함경도 전역의 유향소에 편지를 보내어 동조 세력을 조직하고 민심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길주에서 거사하기 전에 벌써 함경도 전체 군현의 토호들과 연계를 가지고 각기 자기 고을의 수령들을 처단할 것을 지시하였다. 각 군현의 백성은 유향소의 지도하에 앞을 다투어 자기 고을의 수령들을 처단하였다[『세조실록』 13년 5월 16일]. 이시애는 아우 이시합 등과 함께 길주에 와 있던 함길도절도사강효문을 베고 길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

강효문을 살해한 이시애는 길주목사설정신(薛丁新), 부령부사김익수(金益壽) 등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을 살해했다. 한편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강효문이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 등의 중신과 결탁해 모반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는 반란이 아니라 의거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함길도 백성에게는 이시애가 세조의 뜻을 받들어 중앙의 여러 중신과 결탁한 반신(叛臣)을 정벌해 평정하였다고 속여 그들의 협력을 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받은 세조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신숙주와 그의 아들들을 잡아들이고 와병 중이던 한명회는 가택에 연금시켰다. 그러나 이시애가 난의 주모자임이 확실해지자 반란을 토벌하기 위한 군대를 편성하였다. 종친인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함길도·강원도·평안도·황해도의 4도 병마도총사에 임명하고, 호조 판서조석문(曺錫文)을 부총사로, 허종(許琮)을 함길도절도사로 삼고,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을 대장으로 삼아 6도 군사 3만 명으로 함흥을 향해 출발하도록 했다[『세조실록』 13년 5월 17일].

이시애 군대는 관군에게 극렬하게 저항하여 전투 초반에는 진압군의 위세가 낮을 정도였다. 세조는 전국에 걸쳐 병력을 더 모으고, 직접 정벌에 나설 의사를 표현하는 등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세조실록』 13년 5월 25일] (『세조실록』 13년 7월 1일). 그리고 지속적으로 병장기와 군량을 진압군에게 지원해 주었다.

이러한 세조의 독전(督戰)과 장기전을 전술로 택한 진압군의 작전, 그리고 남이 등의 활약에 힘입어 전세는 마침내 호전되었다. 게다가 반군 세력은 자체 분열을 일으켰다. 당시 사옹별좌(司饔別坐)이던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許惟禮)가 자기 부친이 이시애 일파에게 억지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주(李珠)·황생(黃生) 등을 설득하여 이시애와 이시합 등을 체포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시애는 8월 12일에 이준의 진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당하고 이시합과 함께 사지를 찢겨 3일 동안 효수되었다(『세조실록』 13년 8월 12일) (『세조실록』 13년 8월 18일). 이로써 3개월 넘도록 함경도를 휩쓸었던 난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함길도는 남·북 2도로 분리되었으며 유향소도 폐지되었다[『세조실록』 13년 9월 4일].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성무, 『조선왕조사 1』, 동방미디어, 1998.
  • 한국역사연구회, 『모반의 역사: 역사는 그들을 역모자라 불렀다』, 세종서적, 2001.
  • 김상오, 「이시애의 난에 대하여(상)」, 『전북사학』2, 1978.
  • 김상오, 「이시애의 난에 대하여(하)」, 『전북사학』3, 1979.
  • 이동희, 「이시애 난에 있어서 한명회·신숙주의 역모 연루설」, 『전라문화논총』7, 1994
  • 정태헌, 「세조의 이시애 난 수습 정책」, 『사학연구』38,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