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응룡(征楊應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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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말기 사천 지방에서 양응룡 등을 위시한 묘족이 일으킨 난을 진압한 사건.

개설

양응룡(楊應龍)의 난은 발배(哱拜, [보바이])의 난·임진왜란(壬辰倭亂)과 함께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이라 불린다. 중국의 파주(播州) 지역은 옛날부터 양씨(楊氏) 일족이 군장(君長)의 역할을 수행해 온 곳이었다. 만력제의 재위기에 양응룡은 주변 지역을 공격하고, 총애하던 첩이 처(妻)를 죽이도록 했다는 혐의 때문에 붙잡혀 중경(重慶)으로 호송되었다. 하지만 중경에서 탈출에 성공했던 양응룡은 묘족(苗族)과 결탁하고, 망명한 자들을 모집해서 자신의 근거지 일대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양응룡의 반란군은 한때 중경부(重慶府)까지 압박해 들어갔고, 험준한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관군의 공격을 방어했다. 하지만 총독(總督)이화룡(李化龍)이 지휘하던 관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퇴했다. 반란에 실패한 양응룡은 전사했고, 그의 일당과 가족들은 포로로 잡혀서 수도로 압송되어 처벌받았다.

경과

『조선왕조실록』에서 양응룡이 처음 언급된 것은 1598년(선조 31)이다. 당시 선조가 명군을 지휘하던 제독(提督)유정(劉綎)과의 대화 내용을 신하들에게 언급하면서였다. 이때 유정은 선조에게 자신이 사천(四川)에서 발생한 양응룡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다는 사실과 서쪽 변방의 유목민족인 서강(西羌)의 반군을 격파하기 위해 곤륜산(崑崙山)까지 다녀왔다고 말했다. 선조는 유정의 설명이 매우 과장된 것으로 생각했다(『선조실록』 31년 6월 23일).

1599년(선조 32) 2월 이덕형은 선조에게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의 장수들에 관한 내용을 보고하면서 양응룡의 난을 언급했다. 당시 이덕형은 양응룡의 반란 규모가 매우 컸다는 점과 제독유정 등이 이를 진압했다는 내용 등을 설명했다. 이에 선조는 신료들에게 양응룡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언급했다(『선조실록』 32년 2월 1일). 선조 32년의 기록을 통해서 본다면 당시 조선은 중국에서 양응룡의 난이 다시 발생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양응룡의 반란은 규모가 매우 컸기 때문에 명에서는 조선에 출병했던 장수와 군사를 차례대로 철수시키고자 했다. 양응룡의 군세가 운남(雲南)과 귀주(貴州) 지방을 크게 혼란스럽게 만들어, 명 조정에서는 보다 많은 병력을 파주 지역에 파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력제는 유정에게 지시를 내려 본국으로 철수한 뒤 토벌군을 인솔하고 양응룡의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했다(『선조실록』 32년 3월 7일).

결국 1600년(선조 33) 양응룡의 난이 진압되었다는 사실이 조선에 전달되었다(『선조실록』 33년 7월 16일). 다음 해 4월 명에서는 양응룡의 난을 평정했다는 내용의 조서(詔書)를 조선에 보냈다(『선조실록』 34년 4월 25일).

참고문헌

  • 『만력삼대정고(萬曆三大征考)』
  • 『명사(明史)』
  • 『명실록(明實錄)』
  • 久芳崇, 「16世紀末, 日本式鐵砲の明朝への傳播-萬曆朝鮮の役から播州楊應龍の亂へ」, 『東洋學報』84-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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