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지전(龍仁之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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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점령한 도성을 탈환하기 위해 출전한 충청·경상·전라 지역의 조선군이 용인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

개설

1592년(선조 25) 5월 일본군에 의해 도성이 함락되자 경상·전라·충청 등 삼남 지역 군사들이 도성 탈환을 위해 한성으로 향했다. 이들은 스스로 남도근왕군 또는 삼도근왕군을 칭하며 수원에 이르렀다. 하지만 삼도근왕군은 경기도 용인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여 도성 수복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특히 5만여 명의 조선군이 2천 명에 불과한 일본군에게 패한 사실은 조선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 전투의 패배로 한강 이남에서 조선군은 더 이상 일본군을 저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의 부산진 공격으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고, 4월 30일 새벽 선조는 도성을 비우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5월 3일 선조는 심대(沈岱)를 파견하여 영남과 호남의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여 구원할 것을 명하였다. 전라도관찰사이광(李洸)은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던 중 도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이 동요하여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본진으로 돌아가 버렸다(『선조실록』 25년 5월 3일). 전주로 돌아온 이광은 다시 군사를 징발하여 도성 탈환을 위해 북쪽으로 향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발단

이광은 2만 또는 4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주목사(羅州牧使)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장으로 삼고 충청도 임천역(林川驛)으로 진출하였다. 전라도방어사곽영(郭嶸)은 2만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광주목사(光州牧使)권율(權慄)을 중위장, 전 부사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금강을 건넜다. 한편 충청도관찰사윤선각(尹先覺)은 병사신익(申翌)·방어사이옥(李沃)과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양(溫陽)에 집결했고, 경상도관찰사김수(金睟)도 수백 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합류하였다.

삼도근왕군은 5월 26일 경기도 진위(振威: 현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모였다. 근왕군은 스스로 10만 명이 넘는다고 했으며, 『선조실록』에는 8만 명이 넘는다고 했지만(『선조실록』 34년 8월 28일), 실제 병력은 5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수원으로 진출하여 남쪽 지역과 한성 사이의 통로를 확보한 후 한성으로 진격하기로 하였다.

1592년 6월 3일 삼남지역 근왕군은 수원으로 진출하여 독성산성(禿城山城)에 주둔하였다. 수원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군의 세력이 강한 것을 보고 용인에 주둔한 일본군에 합류했다. 6월 4일 근왕군은 용인으로 진군했다. 용인의 일본군을 격멸한 후 한강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맞서 일본의 장수 도변칠여위문(渡邊七右衛門)은 600여 명의 군사로 용인 부근 북두문산(北斗門山)과 문소산(文小山) 등에 소루(小壘)를 만들어 조선군에 맞섰다.

경과

6월 4일 이광은 권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지시와 백광언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선제공격하도록 했다. 조선군은 일본군 10여 명을 참살하고 목책에 불을 지르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자 일본군은 북두문산의 병력을 문소산으로 옮겨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이튿날 아침 조선군은 다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은 전투를 피하면서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전이 지나 한성에 있던 협판안치(脇坂安治)가 거느린 구원군이 문소산에 도착했다. 구원군을 맞이한 일본군은 조선군에게 일제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이 전투에서 선봉장 이지시와 백광언, 그리고 함열현감(咸悅縣監)정연(鄭淵)과 고부군수(古埠郡守)이광인(李光仁) 등이 전사하였다.

일본군의 불의의 습격에 패한 조선군은 광교산(光敎山)으로 퇴각하여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조선군은 6월 6일 다시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6일 아침 조선군이 식사 중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 일본군이 먼저 공격을 가해왔다.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받은 조선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참패를 당하였다.

5만여 명의 군사가 2천여 명에 불과한 일본군에 패했다는 사실은 조선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조선군에 의한 한성 수복은 이룰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 후 이광은 전주, 윤선각은 공주, 김수는 경상도 지역으로 퇴군하였다. 또 전투에서 패한 죄로 이광은 파직되었고, 충청병사신익은 백의종군해야 했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쇄미록(瑣尾錄)』
  • 류재성, 『한민족전쟁사』Ⅲ, 국방부군사연구소, 1996.
  • 온창일, 『한민족전쟁사』, 집문당, 2008.
  • 이형석, 『임진전란사』상, 신현실사, 1977.
  • 하태규,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관군의 동향과 호남방어」, 『한일관계사연구』26, 한일관계사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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