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계공인(正鐵契貢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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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철계공인 |
한글표제 | 정철계공인 |
한자표제 | 正鐵契貢人 |
상위어 | 공인(貢人) |
동의어 | 정철계(正鐵契) |
관련어 | 정철(正鐵), 철장(鐵場), 대동법(大同法), 선혜청(宣惠廳), 선공감(繕工監) |
분야 | 경제/재정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최주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철계공인(正鐵契貢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19년 1월 8일, 『세종실록』 12년 12월 1일, 『문종실록』 1년 6월 16일, 『세조실록』 10년 12월 7일, 『선조실록』 26년 7월 29일, 『광해군일기』 6년 7월 25일, 『광해군일기』 13년 9월 23일 |
선공감에 속하여 정철을 조달하던 공계인.
개설
정철(正鐵)은 조선시대 철갑옷과 총(銃)·포(砲)를 제작하는 원료로 쓰이는 한편, 병선(兵船)과 관곽(棺槨)에 들어가는 쇠못 재료로도 활용되었다. 시우쇠라고도 하였다. 정철계공인(正鐵契貢人)은 조선전기에 철산지에서 본색(本色)으로 상납하던 정철을 대동법 시행 이후 선혜청으로부터 공물가를 받아 전문적으로 조달하던 공계인(貢契人)을 일컬었다.
담당 직무
정철계공인은 궁궐을 짓거나 정부 각사의 건물 수리 등에 소비되는 정철을 조달하던 공인으로서, 선공감에 속해 있었다. 『공폐(貢弊)』가 작성된 1753년(영조 29) 무렵만 해도 선공감공인(繕工監貢人)이 정철을 조달한 것으로 보이나, 이후 수철계(水鐵契)·장인철계(匠人鐵契) 등의 공계인이 사료 상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선공감 산하에 정철계가 별도로 창설된 듯하다(『고종실록』 19년 1월 8일).
변천
조선전기에는 군기감과 선공감에 정철을 공물(貢物)로 바쳤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철이 많이 나고 땔나무가 풍부한 곳에 철장(鐵場)을 설치하여 철간(鐵干)으로 하여금 정련하게 하거나(『세종실록』 12년 12월 1일), 철장도회(鐵場都會)를 지정하여 감사로 하여금 도회의 주변 고을에서 생산한 철을 모아 상납하게 하였다(『문종실록』 1년 6월 16일). 이렇게 정련한 정철은 군기감과 선공감에 공납하였으며, 일부는 지방 관아에서 소비하였다. 그러나 철장지(鐵場地) 주민들에게 정철을 공납하는 부담이 편중되었기 때문에 세조대에는 쌀로 대납하게 해 주었다.
1464년(세조 10) 호조의 등록(謄錄)을 보면, 풍년에는 정철 1냥(兩)에 쌀 3승(升)으로, 흉년에는 2승으로 대납하게 한 조치가 나타난다(『세조실록』 10년 12월 7일). 이후 철산지에서도 정철을 본색으로 상납하지 않고 쌀로 대납하는 관행이 17세기까지 확대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명나라 장수 경략(經略)의 요구로 정철의 산지와 철장의 소재지를 파악하여 무기를 직접 만든 일이 있었다(『선조실록』 26년 7월 29일).
하지만 광해군대에 화기도감(火器都監)을 설립하여 군기를 만들 때 정철을 본색으로 상납하지 않는 문제가 거론된 것으로 보아 전쟁이 끝난 뒤에는 정철을 쌀로 대납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당시 화기도감에서는 정철을 쌀로 대납하기 때문에 중간에 중개료로 빠져나가는 세곡이 과다함을 지적하면서 각 도와 군현에서 정해진 값에 따라 정철을 쌀과 포로 바꾸어 거두는 것을 공식화하여 서울에서 사서 쓰는 방안을 제안하였다(『광해군일기』 6년 7월 25일).
광해군대에는 특히 궁궐 중수(重修)와 영건(營建)이 대대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건축용 자재로서 정철의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민간에서 정철을 헌납한 자들에게 관직을 내려주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9월 23일). 그러나 국가적인 정철 수급 방식의 변화는 대동법을 통하여 큰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조선후기에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산지에서 현물로 바치던 정철은 선공감이나 군기시에 속한 공물주인이 시장에서 조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호조와 선혜청에서 공물가를 지급받아 해당 관서에 정철을 진배하는 전문적인 청부상인이었다. 특히 정철계공인은 선공감에 속하여 건축용 자재로 쓰이는 정철을 납품하였다. 1753년(영조 29)에 작성된 『공폐』에는 선공감공인이 선공감과 영건도감에 정철을 진배하면서 겪는 고통을 하소연하는 상언(上言)과 그에 따른 비변사의 제사(題辭)가 실려 있었다. 아마도 고종대에 확인되는 정철계공인은 영조대 중반 이후 정철만을 전문적으로 납품하는 공계인으로 창설된 듯하다. 이들은 갑오개혁기에 공납제를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선혜청을 중심으로 한 공물 조달 체계가 해체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공폐(貢弊)』
- 『만기요람(萬機要覽)』
- 유승주, 『朝鮮時代鑛業史硏究』,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3.
- 안병우, 「조선전기 鐵物의 생산과 유통」, 『東方學志』 119, 2003.
- 오미일, 「18·19세기 새로운 貢人權·廛契 창설운동과 亂廛活動」, 『奎章閣』 10, 1987.
-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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