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응사(進鷹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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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명·청에 해동청을 진헌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절의 명칭.

개설

조선에서 중국으로 파견된 사절들은 동지사(冬至使)·정조사(正朝使) 등의 정기적인 사절과 사은사(謝恩使)·진하사(進賀使)·진주사(進奏使)·진위사(進慰使)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파견하는 부정기적인 사절이 있었다. 조선이 명조에 규정 이외의 공물 예컨대, 조선의 종이나 사냥용 매인 해동청, 환관 등의 공물을 바치기 위하여 부정기적으로 파견되었던 사절을 진헌사(進獻使)라고 하는데 그중 해동청을 진헌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절을 진응사라고 하였다.

담당 직무

해동청은 조선에서 산출되었던 매로, 송골매·해청(海靑)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매 중에서도 매우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였으며, 왕실의 매 사냥에 주로 이용되었다. 그 명성은 고려 때에 이미 몽골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진응사는 일종의 조선 특산물이었던 해동청을 중국에 전달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세종실록』 9년 10월 14일)(『세종실록』 9년 10월 16일).

변천

고려말 원과의 외교 시에 해동청은 양자 간의 예물로서 교환되곤 하였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세종대와 세조대에 진응사 파견 사례가 특히 많았는데 이것은 당시 명 황제가 해동청을 애호하여 진헌 요구를 많이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1508년(중종 3) 명의 사신으로부터 해동청을 요구받자 조선 조정에서 중단된 해동청 진헌을 다시 하면 폐단이 많을 것이며 금·은을 조공품목에서 제외할 때 해동청도 제외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진응사 파견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중종실록』 3년 1월 8일). 다만 금·은을 토산물로 대체하고자 했던 것은 세종 연간에 있었던 일이나, 이후 세조대에도 진응사 파견의 일이 있었고, 1654년 청의 기사에도 조선진응사김여건(金汝楗)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후에도 진응사 파견은 계속된 듯하다.

참고문헌

  • 『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
  • 김경록, 「조선시대 조공체제와 대중국(對中國) 사행」, 『명청사연구』 30, 명청사학회, 2008.
  • 이영옥, 「조선·청조의 조공관계와 외교질서-『중국역대조공제도연구』의 비판적 분석」, 『인문과학연구』 29, 성신여자대학교 , 2011.
  • 李善洪, 「明清時期朝鮮對華外交使節初探」, 『曆史檔案』, 中國第一歷史檔案館,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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