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장(錚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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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나 민간에서 사용할 징이나 꽹과리를 만들던 장인.

개설

조선시대 쟁장(錚匠)은 병조나 군기감(軍器監)에 소속되어 군대에서 사용할 징[鉦]이나 꽹과리[鍮錚]와 같은 금속제 타악기를 만들던 장인으로, 속어로는 징장[鉦匠]이라고도 부른다.

쟁장은 금속을 두드려 징이나 꽹과리를 만들었는데, 조선 건국 초기에는 군사훈련 등을 위해 이들 타악기의 제작 수요가 많았다. 조선초기에 쟁장은 2명이었으나, 세종대에 2명으로 늘었고, 세조대에는 15명까지 증가하였다.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이 편찬될 당시에는 군기시에 쟁장 11명이 편입되어 있었다.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악기는 군사용보다 왕실의 연향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담당 직무

쟁장은 징이나 꽹과리는 만드는 일을 하였다. 징과 꽹과리와 같은 금속제 타악기는 두드려서 제작하는 단조(鍛造)에 의해 제작된다. 이러한 악기는 국가나 민간에서 두루 사용되었다. 국가적인 용도로는 군대에서 군인들의 사기를 돋우거나 행진 시 박자를 맞출 때 사용되었다. 왕실의 의례 행사 때 속악을 연주하거나 민간에서 농악을 연주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고 병장기를 확충하였다. 1434년(세종 16) 쟁장은 2명이 존재했었으나, 당시 병조와 군기감 제조가 장인의 숫자를 늘리도록 요청하여 쟁장도 2명을 더하여 4명으로 증가하였다(『세종실록』16년 6월 11일). 이후 쟁장의 수요가 많았는지 1460년(세조 6)에는 병조에 소속된 쟁장의 숫자가 15명이었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경국대전』에 의하면 이들 쟁장은 군기시에 11명이, 풍물장은 상의원에 8명이 소속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 관청에서 필요한 군악대용 악기나 왕실 행사용 악기를 제작하였을 것이다. 이들 쟁장은 3번(番)으로 나누어 5명씩 근무토록 하였고, 체아(遞兒)는 부급사(副給事) 1명으로 하였다.

이후 쟁장은 보이지 않고 16세기 초 연산군 때부터는 풍물장의 사례만 발견된다. 이들이 궁중의 연향 행사에 필요한 징과 꽹과리를 제작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1월 12일).

조선후기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의 법전에는 쟁장이 여전히 군기시에 11명이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쟁장은 이미 16세기 초부터 풍물장으로 그 역할이 이행되어 법전의 규정은 사문화되었다. 쟁장을 대신하여 풍물장은 조선후기 왕실 행사를 위해 임시로 설치된 권설도감에 계속 등장하였다.

조선후기에 쟁장의 직역을 대신한 풍물장의 존재는 왕실 행사의 전말을 기록한 『도감의궤』에서 발견할 수 있다. 풍물장이 동원된 도감은 크게 국장도감(國葬都監)과 진연도감(進宴都監)·악기조성도감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국장도감에서는 17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거의 모든 국장 때마다 풍물장을 징발하였다. 그들이 국장도감에서 제작한 악기는 왕이나 왕후의 인산(因山) 시 왕의 시신을 실은 대여(大輿)를 왕릉까지 모셔 가는 길의 앞뒤에 서서 연주할 때 사용되었다. 이는 대여의 이동 시 박자를 맞추고 인산에 참여한 이들에게 국장의 장엄함을 과시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왕실의 잔치인 진연이나 진찬도감에서는 1765년 이후 풍물장을 차출하였다. 이들은 연향 시 향악을 연주할 악기를 제작하여 왕실의 의례 행사를 돋보이게 하였다. 셋째, 종묘나 경모궁에서 사용하기 위해 1625년과 1745년 및 1777년에는 악기조성청에 풍물장을 동원하였다. 왕실의 길례는 사대부가의 제례와 달리 악·가·무가 어우러진 의례로 거행되는 데 이에 필요한 악기를 풍물장이 제작한 것이다.

19세기 들어서면 국장도감에서 3∼4명의 풍물장을 동원하여 앞 시기보다 인원수가 증가하였다. 특히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해 설행한 1828년의 무자 진작 때에는 12명의 풍물장을 동원하였던 예외적인 사례가 있다. 1877년의 진연도감 이후 진연·진찬도감에는 풍물장을 따로 동원하지 않고 악기와 풍물을 제작할 때마다 화원·소목장·두석장·부금장·은장·다회장·마조장·화장 등 6~8종의 장인을 동원하였는데, 이를 통해 분업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의 풍물장은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사장(私匠)이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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