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졸(驛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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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驛站)에 배속되어 군사 정보나 왕명의 전달, 공물의 운반 등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 역노비.

개설

역졸(驛卒)은 역(驛)에서 각종 노역을 제공한 공천(公賤) 즉 역노비를 가리킨다. 고려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이나, 고려초기에는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고려말에 역의 폐단과 관련된 기록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건국 초기의 사회 변동 과정에서 역호(驛戶)가 조잔해지고 유망(流亡)하게 되면서 역졸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왕조를 개창한 건국 세력은 역제를 정비하면서 역졸을 충원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납가속량(納價贖良), 도산(逃散) 및 모록투탁(冒錄投託), 역노승리법(驛奴陞吏法) 등의 실시로 종량화(從良化)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그 결과 역졸 간에 신분이 뒤섞이는 현상도 발생했다.

담당 직무

역졸은 사신 행차에 따른 복물(卜物)의 운송, 공문서의 전달, 입마역(立馬役), 이노작대법(吏奴作隊法)에 따른 군역 등 다양한 일을 수행하였다. 그 중 복물의 운송은 전운노비(轉運奴婢)가, 공문서의 전달은 급주노비(急走奴婢)가 각각 담당하였다.

역졸의 가장 중요하고도 힘든 업무는 말을 사육해 입대(立待)시키거나 말 값을 내는 일, 즉 입마역(立馬役)이었다. 1516년(중종 11)에 능성현령송세림(宋世琳)은 "역졸이 마위전(馬位田)을 지급받아 입마를 담당하고 있으나, 입마역이 역졸들의 생활을 매우 고통스럽게 하여 도산하는 자가 많으므로 우전(郵傳)이 날로 피폐해지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중종실록』11년 7월 15일).

조선전기에 역졸은 주로 신역을 통해 입마역을 수행하였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말 값을 쌀이나 베, 돈으로 납부하는 납전역으로 바뀌었다.

역졸은 그밖에도 사신 행차에 따른 복물(卜物)의 운송과 공문서의 전달도 담당하였는데, 복물의 운송은 전운노비(轉運奴婢)가, 공문서의 전달은 급주노비(急走奴婢)가 각각 담당하였다. 그뿐 아니라 각 고을의 구실아치와 노비 등으로 군대를 편성하게 한 이노작대법(吏奴作隊法)에 따라 수령의 수하친병(手下親兵)으로 조직되어 군역까지 부담하였다. 이처럼 역졸은 힘든 일들을 많이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도망하거나 역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변천

역졸에 관한 기록은 고려초기에는 보이지 않으며 고려말 사회 변동의 혼란 속에서 역호의 조잔과 유망과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이로 볼 때 역졸은 고려후기에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역졸은 역역(力役)에 따라 전운노비와 급주노비로 나눌 수 있다. 전운노비는 혁거사사노비(革去寺社奴婢)에서 비롯되었는데, 역에서 사신의 복물이나 진상, 공부(貢賦) 등의 관수품을 운반하는 일을 하였다. 이에 비해 급주노비는 각력(脚力)을 이용하여 문서를 전송하는 일을 맡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역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20년(세종 2)에는 역졸의 자식이나 공사 노비의 자식들이 도첩제를 어기고 승려가 되고 있다는 기사이다『세종실록』 2년 11월 7일 3번째기사]. 또 6진 개척 이후인 1433년(세종 15)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던 세종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향리, 역졸, 공천, 사천 중 희망자를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 신역의 면제와 토관직 제수 등의 혜택을 줄 것을 검토한 기록도 나타난다(『세종실록』 15년 11월 19일).

그러나 급주노비와 전운노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각각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에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역졸은 조선 건국 당시부터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졸은 역(驛)에 매인 공노비로, 신분과 신역이 세습되었다. 그러나 양란 이후 조선후기에 이르면 양민의 인구 감소와 노비 인구의 증가 현상이 나타나면서 양역에 종사해야 할 인구의 확보 문제가 대두하였다. 그 결과 천인종량화(賤人從良化)의 길이 열려 역졸도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역졸은 재물을 바치고 신분을 바꾸는 허속(許贖), 세도가를 등에 업고 신분을 바꾸는 모칭양인(冒稱良人), 혹은 관노비를 역리로 신분 상승시키는 역노승리법(驛奴陞吏法)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양인이 되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급주노비에게는 입역에 대한 대가로 3정을 1호로 편성하여 1호마다 한전(閑田)과 다량의 토지를 점한 사람의 진황전(陳荒田) 50복(卜)씩을 구분전(口分田)의 명목으로 지급하였다(『세종실록』 6년 3월 25일). 그러나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경작권만을 지급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전운노비에게는 목장전(牧場田)과 군자전(軍資田)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1445년(세종 27) 국용전(國用田)의 설치와 함께 구분전이 혁파되자 직역전(職役田)으로 바뀌어 전운노비의 구분전은 폐지된 것으로 보이며, 급주노비의 구분전은 급주전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김태영, 『조선전기토지제도사연구』, 지식산업사, 1983.
  • 전형택, 『朝鮮後期奴婢身分硏究』, 일조각, 1989.
  • 조병로, 『朝鮮近世驛制史硏究』,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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