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용감공인(濟用監貢人)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0:55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제용감에 속하여 비단·포목 등을 정부 관서에 조달해 바치던 공인.

개설

조선전기에 제용감(濟用監)은 중국으로 보내는 사(紗)·나(羅)·능(綾)·단(段) 등 각종 비단과 포목, 그리고 왕실에서 소비하는 가죽, 포화(布貨)를 마련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1392년(태조 1) 문무백관의 관제를 정비할 당시 제용고로 운영하였다가, 1409년(태종 9) 정3품아문으로 승격되면서 제용감이라 하고, 감고(監庫)를 두어 나라의 창고 물품인 탕장(帑藏)을 관리하였다. 그런데 조선후기 들어 제용감의 운영에 변화가 나타났다. 진헌용 인삼을 마련하는 일은 더 이상 담당하지 않게 되었으며,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진헌용 비단과 포화·염색 재료 등을 직접 마련하지 않고 제용감 소속 공인을 통하여 조달받았다. 『대전통편』이 간행된 정조대 이후로 제용감은 정3품 정(正)과 종3품 부정(副正), 종4품 첨정(僉正)의 원액(元額)을 삭감하여 종5품아문으로 운영하였다. 제용감공인은 갑오개혁기에 선혜청을 혁파할 때까지 계속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조선전기에 제용감은 중국에 진헌하거나 왕실 각 전(殿)·궁(宮)의 의복을 제작하는데 쓰이는 직물을 마련하고, 그것을 염색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조선전기 제용감 운영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태종대에 제용고에서 제용감으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공물아문 외에 정부 기금을 비축하는 탕장의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다. 조선초에 현물화폐로 쓰였던 질이 나쁜 포인 추포(麤布)를 대신하여 종이 돈인 저화(楮貨)를 유통시키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때 제용감에서 시중의 추포를 사들이는 대신 저화를 발급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태종실록』 11년 1월 21일). 이처럼 정부 차원에서 포목을 대신하여 저화를 유통시키는 정책을 펴면서 시중에서 저화의 값이 떨어지면 제용감의 잡물로 저화를 사들이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5년 7월 14일).

제용감에서 진배하는 비단·정포·인삼·가죽류는 지방군현에 공물로 분정(分定)하거나 시중에서 무역으로 마련하였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제용감에 속한 공물주인들과 역인(役人)들이 제용감에서 마련해야 하는 직물을 공물가를 받고 구입하거나 만들어 바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제용감공인(濟用監貢人)들은 선혜청으로부터 공물가(貢物價)를 받아 각종 직물과 의복을 제작하여 진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용감의 고직(庫直)을 세우는 비용을 대고, 관원의 능라제복과 병풍을 과외로 바치는가 하면 국가의 길흉대례와 과장(科場), 즉 과거시험장이 열릴 때 자주 동원되었다. 이는 애초에 선혜청에서 지급받는 공물가가 물품 값이 아닌 시역(市役)을 수행하는 반대급부의 성격이 강하였던 점을 시사하였다. 이처럼 제용감공인은 제용감의 원공에 해당하는 각종 물품을 바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각사 소속 공인들과 마찬가지로 제용감에 할당된 국역과 기타 과외로 수행해야 하는 각종 역을 담당하였다.

변천

제용감공인은 갑오개혁기에 호조로 재정기구를 단일화하고 선혜청을 중심으로 한 공물 조달 체계가 해체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공폐(貢弊)』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송수환, 『朝鮮前期 王室財政硏究』, 집문당, 2000.
  • 최주희, 「조선후기 왕실·정부기구의 재편과 서울의 공간구조」, 『서울학연구』 49, 2012.
  •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