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사(招諭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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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나 반란으로 인하여 민심이 동요된 지역에 파견되어 백성들을 설득하고 의병 봉기를 독려하는 임무를 수행한 임시 관직.

개설

임진왜란 초반 일방적 패배와 지방관의 도주·은신으로 인해 통치 질서가 공동화(空洞化)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사민(士民)에 대한 충성과 지지를 확보하고 의병 봉기를 독려하기 위해 파견된 임시 관직이다.

담당 직무

임진왜란 발발 초기, 관군의 무기력한 패배와 도주로 인해 민심이 이반된 경상우도에 파견되어 도주·부역한 백성들을 설득하여 방어 역량을 결집시키고 의병 활동을 독려·통제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초유사는 『경국대전』 등의 법전류에는 기재되지 않은 특설 관직으로, 당상관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자에 한하여 임명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은 초유사 외에도 안집사(安集使), 소모사(召募使) 등의 관직을 해당 지역 연고의 전직 관료나 인망 있는 사림에게 부여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 활동을 장려하도록 하였다. 초유사는 경상우도에만 파견되었으며, 역임한 인물도 김성일(金誠一)이 유일하다.

초유사의 초기 임무는 「초유문(招諭文)」을 작성하여 도주·관망 상태에 있던 경상도 지역의 사민을 회유하여 의병 봉기에 참여하거나 의병 활동을 지원하도록 독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초유사는 자신의 권한으로 각 고을의 봉기자에게 의병장(義兵將), 소모장(召募將), 소모유사(召募有司) 등의 직책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초유사의 이러한 조치는, 자의적으로 무장 봉기할 경우 자칫 반란 세력으로 오인받을 수도 있다는 재지사족(在地士族), 즉 향촌사회 지배 계층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초유사의 또 다른 임무는 부임지를 버리고 숨어 있던 지방관을 질책하여 방어 작전에 적극 참여하도록 독전(督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휘 체계, 군수품 조달, 병력 확보 등을 놓고 발생한 관군과 의병의 불화를 중재하는 것도 초유사의 주요 임무였다. 경상도관찰사김수(金睟)와 의병장곽재우(郭再祐)의 심각한 갈등을 중간에서 적절하게 조정하여 해소시킨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선조실록』 25년 6월 28일).

이상의 활동을 통해 초유사는 당시 경상도 전역에서 봉기한 의병을 일원적으로 지휘·통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 초기 관찰사 등의 부재 시에는 직접 관군을 지휘하여 방어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성일은 진주성 고수를 통한 호남 방어를 주장하는 한편, 목사(牧使)김시민(金時敏)을 적극 지원하여 1592년(선조 25) 10월에 거둔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에 일조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5년 12월 5일).

변천

임진왜란 종전 이후에는 초유사 임명의 사례가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사일기(龍蛇日記)』
  • 『학봉집(鶴峯集)』
  • 이장희, 「의병성격의 분석」, 『한국사론』22, 국사편찬위원회, 1992.
  • 허선도, 「학봉(鶴峯) 선생과 임진의병 활동」, 『학봉의 학문과 구국 활동』, 학봉선생기념사업회, 1993.
  • 허태구, 「김성일 초유(招諭) 활동의 배경과 경상우도 의병 봉기의 함의」, 『남명학연구』41, 남명학연구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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