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笠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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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남자들이 머리 위에 쓰던 갓을 만들던 장인.

개설

갓은 꼭대기가 볼록한 대우와 햇빛을 가릴 수 있는 넓은 차양으로 이뤄져 있는데, 각 부분을 만드는 장인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곧 대우를 만드는 장인은 모자장(帽子匠), 양태를 만드는 장인은 양태장(凉太匠), 양자를 합쳐 갓으로 완성시키는 장인은 입장(笠匠)·입자장(笠子匠)·사립장(絲笠匠) 등 다양하게 불린다. 또 모자의 종류에 따라 초립장(草笠匠)이나 유립장(襦笠匠) 등으로도 나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성인 남자들은 유교적 이념으로 의관정제(衣冠整齊)를 중요시 여겨 평상시에도 갓을 씀으로써 그 수요가 많았다. 더욱이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갓의 높이나 넓이가 달라지는 등 유행에 따라 갓의 제작이 많아졌다. 이에 갓을 제작하는 장인들의 처지도 달라졌다. 17세기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경공장(京工匠)이 동원되었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는 상의원이나 공조에 소속되었거나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 등 군문에 소속된 장인이 차출되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는 갓의 수요층이 사대부로부터 일반 서민에까지 확대되면서 갓을 생산하는 장인들도 관청에 얽매여 있지 않고 사적인 생산을 도모하였다.

담당 직무

갓은 조선시대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착용해야 해서 갓을 만드는 장인은 모자장·양태장·입자장으로 분화되었다. 그들 장인들은 원래 대나무를 이용하여 패랭이[平凉子]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조선초기부터 모자와 차양을 각각 만들어 조립하는 초립(草笠)으로 변모되었다. 이러한 초립을 만드는 장인은 초립장으로서 상의원과 공조에 각각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의 전형적인 갓 형태가 완성된 것은 성종 때였다.

당시 갓은 모자의 꼭대기는 평평하고 위는 좁고 아래가 넓으며[上陜下寬], 양태는 중간 부분이 봉긋하게 올라와 바깥으로 갈수록 비스듬한 곡선을 이루는 사립(斜笠)이었다(『성종실록』 20년 3월 25일). 그러다 연산군 말기가 되면 모자가 낮고 양태가 넓은[體低幨廣] 갓이 유행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5월 28일). 중종대에는 연산군대의 풍속을 고치려 노력하여 중종 말경에 이르면 모자는 높고 크며 양태는 좁은 갓이 유행하였다(『중종실록』 20년 5월 16일). 명종대에는 다시 모자는 낮고 양태는 넓은 모자가 유행하였다(『명종실록』 11년 6월 19일). 선조대에는 모자의 꼭대기는 높고[頂極高] 양태는 좁은 갓[邊極狹]이 유행하였다. 17세기 광해군대에는 모자는 낮고 양태가 큰 갓이, 현종대에는 모자는 낮고 양태도 좁은 갓이 유행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갓의 연원은 정확히 상고할 수 없다. 다만 고구려 감신총 벽화에 삿갓을 쓴 인물을 그 연원으로 보기도 한다. 갓의 어원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발견되는데, 머리에 쓰는 쓰개를 총칭하는 용어이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갓의 형태는 고려의 패랭이[平凉子]에서 연유하고, 이것이 초립을 거쳐 갓으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갓의 재료는 패랭이나 초립과 마찬가지로 대나무였으나 1420년경부터 말총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평안도 영안에 말총으로 모자를 만드는 총모아장(驄帽兒匠) 1명이 등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초기부터 갓일과 관련되는 장인들이 여러 장색으로 분화되어 『경국대전』에 의하면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등재되었다. 어의용 공예품을 제작하는 상의원에는 모자를 만드는 모자장 2명, 차양을 만드는 양태장 2명, 초립을 만드는 초립장 6명, 모자에 천이나 실을 덧대어 겹으로 만들던 유립장 2명이 소속되었다. 공조에는 초립장 19명, 모자장 6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가 되면 부유한 일반 상민들까지 갓을 착용하면서 수요가 증가하자 그것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장인의 장색이 세분화되었다. 입자장은 모자를 만드는 모자장·사립장 등으로 분화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갓의 제작 과정이 분화되고 사회적 분업이 촉진되자 장인의 숫자도 증가하였다. 왕실의 행사를 위해 동원된 장인들을 보면 입자장은 연 총인원 656명, 양태장은 110명이었다. 그리고 시기에 따라 장인의 숫자도 달라져 17세기보다 18세기에 더 많은 장인이 동원되었으나, 18세기 말에 장인들의 직역이 사장(私匠)으로 변하면서 19세기에는 장인들의 동원이 이전보다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갓을 만드는 장인들의 처치는 도감에 징발된 장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전반 도감에서 갓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입자장은 경공장이었고 향공장은 동원되지 않았다. 18세기에는 갓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장인의 숫자가 늘었다. 17세기 후반에 경공장이었던 장인들의 처지가 이 시기에는 상설 아문에 소속된 관장도 있었고, 관장에서 사장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입자장의 일부는 상의원·공조를 비롯하여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 등의 군문에 편입되어 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관장에서 사장으로 처지가 변하는 양상은 1744년(영조 20)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를 편찬한 시기를 전후하여 확연하게 드러난다. 1744년 이전에는 관장의 비중이 전체의 77%였던 데 비해, 그 이후에는 사장이 전체의 88%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한 집안의 부자간이나 형제간이 모두 장인으로 활동하여 장인 집안을 형성하는 경우도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였다.

18세기 말부터 장인들의 처지가 관장에서 사장으로 변모하거나 부자간·형제간의 장인 집안이 만들어진 것은 이 시기 갓의 사회적 가치가 높았음을 반증한다. 곧 수요층의 증가와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나타난 사회적 현상이다. 이로 인해 장인과 상인들이 서로 이익을 독점하려는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18세기 말에는 상인보다 장인들이 생산품을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계림유사(鷄林類事)』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장경희, 『조선시대 관모공예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4.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