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저창공인(豊儲倉貢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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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쌀, 콩, 초둔(草芚) 등의 물품을 출납하던 풍저창 소속 공물주인.

개설

풍저창(豊儲倉)은 고려 문종대에 개경에 설치한 좌창(左倉)·우창(右倉) 중 우창을 1308년(충렬왕 34)에 풍저창으로 이름을 바꾼 이후 조선시대까지 계속 운영되었다. 1392년(태조 1년)에 문무백관의 관제를 개편할 당시 풍저창은 중앙 재원의 세입·세출을 전반적으로 관장하는 아문으로 출범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조선전기 풍저창은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사도시(司䆃寺)·광흥창(廣興倉) 등과 함께 전세(田稅)를 나누어 거두어들이는 한편, 전세조로 공물을 거두어들여 중앙 관서의 용도에 따라 지출하였다. 본창은 한성부 북부 의통방에 설립하였고 한강 주변의 송현·서강에도 분풍저창(分豐儲倉)을 세워 중앙으로 상납되는 전세를 비축하고 출납을 관리하였다. 광흥창과 함께 정4품아문으로 운영되다가 1637년(인조 15) 무렵 장흥고(長興庫)에 병합되었다(『인조실록』 15년 3월 8일). 그러나 풍저창은 장흥고에 통합된 이후 선혜청(宣惠廳)에서 공물가를 받아 쌀, 콩, 짚 등을 엮어 만든 뜸[草芚], 종이 등의 물건을 관장하는 공물아문으로 기능하였으며, 풍저창공인(豊儲倉貢人) 또한 고종대까지 활동하였다(『고종실록』 19년 1월 8일).

담당 직무

조선초 풍저창의 주된 기능은 국용(國用)으로 쓰일 세곡(稅穀)을 출납하는 것이었다. 국용에는 국가의 제사와 연향, 빈객(賓客)을 접대하는 데 드는 경비뿐 아니라 백성을 국역(國役)에 동원하는 비용과 기근 시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진휼곡(賑恤穀)도 포함되었다. 그런데 1637년(인조 15) 무렵 풍저창은 돗자리·유둔·종이 등의 물품을 조달하던 장흥고에 병합되어 국용을 관장하던 재정기구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풍저창은 장흥고와 더불어 공물아문의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운영 경비 역시 다른 공물아문과 마찬가지로 선혜청에서 지급받았다. 조선후기에 대동법을 확대하여 시행하면서 풍저창에서 전세조 공물을 현물로 직접 받는 대신, 선혜청으로부터 공물가를 받는 풍저창공인으로 하여금 대신 조달하게 한 것이다.

풍저창공인은 풍저창이 장흥고에 병합된 후로도 조달역을 계속 수행하였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1807년 무렵 풍저창공인은 선혜청으로부터 원공물가로 1,974석 13두의 쌀을 받아 초주지·상품도련지·하품도련지·저상주지·도련저주지 등을 시중에서 구입하여 풍저창에 진배하였다.

변천

풍저창공인은 갑오개혁기에 호조로 재정기구를 단일화하고 선혜청을 중심으로 한 공물 조달 체계가 해체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공폐(貢弊)』
  • 『만기요람(萬機要覽)』
  • 송수환, 『朝鮮前期 王室財政硏究』, 집문당, 2000.
  • 이혜옥, 「朝鮮時代의 豊儲倉」, 『역사문화연구』 12, 2000.
  • 최주희, 「조선후기 왕실·정부기구의 재편과 서울의 공간구조」, 『서울학연구』 4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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