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생도(醫學生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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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전의감(典醫監) 및 혜민서(惠民署)와 지방 관서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

개설

조선시대에 의학생도(醫學生徒) 교육은 서울에서는 전의감 및 혜민서, 지방은 8도 군현, 즉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의 관아에서 실시하였다. 의학생도는 취재와 의과를 통해 전의감, 내의원, 혜민서, 활인서 등의 의료 기관에 진출하였다.

담당 직무

의학생도 교육을 담당한 기관은 전의감과 혜민서였다. 전의감은 교육과 함께 궁중의 의료와 시약(施藥)을 관장하였다. 조선은 개국하면서 전의감과 함께 1392년(태조 1)에 혜민국을 설치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혜민국은 1466년(세조 12)에 혜민서로 개칭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혜민서는 의약과 서민의 질병을 구료하는 일과 함께 의학생도 교육을 관장하였다. 혜민서에서는 의녀(醫女)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중앙에는 전의감 50명, 혜민서 30명의 의학생도가 있었으며, 지방에는 3,102명의 의학생도가 있었다. 지방에서 실질적인 활용이 가능한 분야 위주로 기술학 생도 교육이 이루어져 생명을 다루는 의학생도의 수가 다른 잡학에 비해 많았다. 의과생도 교육은 의학 전문서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경국대전』을 강독(講讀)하게 하였다. 『찬도맥(纂圖脈)』·『동인경(銅人經)』은 외우게 하고, 『직지방(直指方)』·『득효방(得效方)』·『부인대전(婦人大全)』·『창진집(瘡疹集)』·『태산집요(胎産集要)』·『구급방(求急方)』·『화제방(和劑方)』·『본초(本草)』·『경국대전』은 보고 강독하게 하였다.

의학생도는 서울과 지방에서 의관들의 지시를 받아 약재를 준비하고 치료를 담당하였다(『세종실록』 3년 12월 18일). 의학생도에게는 외방(外方)이나 본가(本家)에 대한 잡역(雜役)을 면제해주고,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그들의 학업을 전담케 하고 관찰사가 고을을 두루 다니며 강경(講經) 점수로 등수를 매겨 의학을 권장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3년 3월 14일).

변천

의학생도의 정원은 수요를 반영하여 『속대전』에 이르러 바뀌었다. 서울의 의학생도 숫자를 보면, 전의감은 6명이 늘어 56명, 혜민서는 2배가 넘는 32명이 늘어 62명이 되었다. 모두 38명이 늘어나 80명이 118명으로 증가하였다. 전체적으로 잡학생도의 숫자가 늘어났는데, 증가는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지방 생도의 숫자는 일부 역학을 제외하고는 달리 변화가 없었다. 의학생도 교육에서 중앙 집중도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의학생도의 교육 교재도 『속대전』 이후 의과 시험 과목의 변화에 따라 바뀌었다. 『찬도맥』·『동인경』은 외우게 하고, 『직지방』·『본초』·『경국대전』은 책을 보고 강독하게 하였으며, 나머지는 폐지하였다. 대신 『소문(素問)』·『의학정전(醫學正傳)』·『동원십서(東垣十書)』를 새로 추가하였다. 『대전회통』 때 『의학입문(醫學入門)』을 새로 추가하여 외워서 강독하게 하였다. 『의학입문』은 의학의 이론에서부터 경락(經絡), 장부(臟腑), 본초(本草), 병증(病症)에 관한 내용을 포괄하여 의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된 책이다(『순조실록』 31년 8월 30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손홍열, 『한국중세의료제도연구』, 일지사, 1988.
  • 이남희, 「조선전기 기술교육에 관한 일연구」, 『국사관논총』 100, 2002.
  • 이남희, 「조선후기 잡과교육의 변화와 특성」,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13-1, 2014.
  • 이성무, 「조선초기의 기술관과 그 지위」, 『혜암유홍열박사 화갑기념논총』,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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