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장(鑞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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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을 연결하거나 구멍을 메꾸기 위해 땜을 하는 장인. 속칭 땜장이.

개설

땜은 이두로 한음(汗音)이라 쓰고, 금속과 금속을 연결하는 일을 한다. 이렇게 땜을 하는 장인은 납장(鑞匠)·납염장(鑞染匠)·부납장(付鑞匠)이라고 부른다.

담당 직무

땜장은 구멍을 메우거나 금속과 금속을 연결할 때 땜을 하는 일을 한다. 땜은 금속의 표면과 장식 요소 사이에 접착제를 놓고 융점이 낮은 금속을 가열하면 접착제가 녹으면서 모든 요소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땜은 공기 중에서 빠르게 냉각된다. 땜의 재료는 융점을 낮추기 위해 합금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땜질에 사용되는 매개제는 연납(軟鑞)과 경납(硬鑞)이 있다. 납이 녹는점에 따라 450도 이하의 융점을 가진 것을 연납, 그 이상의 융점을 갖는 것을 경납이라고 부른다. 땜은 납으로 작업을 하기 때문에 땜장 혹은 납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단조 작업에서는 두드려서 얇게 제작하면 깨지기 쉽기 때문에 첨가하지 않는다.

변천

땜의 연원은 청동기시대에 금속을 다루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청동기의 주요 구성 성분은 동·주석·납으로서 이들 배합비에 따라 금속의 성질이 달라진다. 동일한 성분 조성이라도 냉각 속도, 열처리, 가공 등의 제작 방법에 따라 다양한 금속 조직을 나타낸다.

주조물에 납을 첨가하는 것은 주조성과 유동성이 좋아지므로 값비싼 주석 대신 구하기 쉽고 값싼 납을 의도적으로 첨가한다. 고대 청동기의 성분 조성에서 시대가 흐름에 따라 납의 양이 많아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납장은 조선후기에 거의 모든 도감에 동원되었다. 땜은 금속을 사용하는 모든 분야에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17세기의 납장은 가장 이른 1601년부터 동원되었고, 납염장은 1647년부터, 부납장은 1694년부터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들 장인들은 대부분 한두 번의 도감에 짧은 기간 동안 차출되어 10년 이상 활동한 장인조차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땜을 하는 기술은 보조적 기능으로서 자립을 할 수 없어 장인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18세기 전기에는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된 관장(官匠)이거나 훈련도감 등 군문(軍門)에 소속되면서 2년∼30년간 도감에 차출되는 것이 특징이며, 가끔 납장으로 불리었다.

18세기 후반 납장은 20년∼30년간 차출되었는데,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사장(私匠)으로 처지가 바뀌었다. 그들은 18세기 말에는 사적 생산에 종사하는 사장으로 동원되어 시대적 추세를 반영하였다.

19세기에는 모두 사장이었던 부납장·납장을 동원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