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전차원(陪箋差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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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가 왕에게 축하나 감사 등의 뜻을 아뢰는 전문(箋文)을 받들고 가는 차사원(差使員).

개설

배전차원은 신하가 왕에게 경사스럽고 기쁜 일을 축하하는 경하(慶賀)나, 까닭을 설명하며 사과의 말을 하는 진사(陳謝) 등의 뜻을 아뢸 때, 전문을 받들고 가는 임시 관원인 차사원(差使員)을 의미하였다. 전문은 나라에 길하거나 흉한 일이 있을 때 신하가 왕께 올리거나, 왕이 그 어버이의 생신 축하에 써 올리던 사륙체(四六體)의 글 종류의 하나였다.

담당 직무

차사원은 대개 관찰사가 관내의 수령들 중에서 차출하였다. 1592년 11월 배전차원 김여봉(金汝峯)은 선조에게 진주(晉州)에서 김해(金海)의 왜적 등이 진주성을 둘러쌌다가 김시민(金時敏)에 의하여 패배한 전황을 알렸다(『선조실록』 25년 11월 12일). 『강원감영지(江原監營誌)』에는 1603년 5월에 수관찰사(首觀察使)로 임명된 이광준(李光俊)이 11월에 배전차원을 가리지 못한 일로 교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 관찰사의 임무 중에 배전차원 선발도 중요한 행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배전차원과 관련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1673년에 배전차원으로 상경하여 조정에 나가 하직 인사를 올린 덕원부사(德源府使)이필형(李必馨)에게 현종은 여러 읍의 폐단과 민간의 고통에 대하여 묻고,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에 힘쓰고 마음을 다하여 직무를 받들라는 당부를 하였다(『현종실록』 14년 2월 6일). 또 영조는 1768년 9월에 모든 도(道)의 전문차원(箋文差員)에게 입시하도록 명한 다음에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물었으며(『영조실록』 44년 9월 14일), 같은 해 11월에는 태묘(太廟)와 각각의 능(陵)과 전(殿)의 동지(冬至) 제사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맞으며, 각도의 전문차원을 불러 보았다(『영조실록』 44년 11월 12일). 이때 보이는 전문차원도 배전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 『강원감영지(江原監營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