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장(弓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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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활을 만들던 기술자.

개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활의 성능은 이미 고구려시대부터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활의 몸체는 물소 뿔, 뽕나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하여 만들어졌고, 그것을 잇는 데는 민어 부레풀을 이용하였는데, 여기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였다. 현재 활을 만드는 궁장(弓匠)과 화살을 만드는 시장(矢匠)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담당 직무

궁장의 역할은 활을 제작하는 것이었지만, 이를 위해 필요한 재료의 확보와 인력 양성도 담당하였다. 『현종개수실록』에는 "북로(北路: 서울에서 함경도로 통하는 길)에는 궁장도 없고 궁각(弓角)도 없어 활을 만들 수 없으니, 각 지방에서 장인을 보내도록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로 보면 궁장 가운데 숙련된 양질의 기술을 가진 자들은 장인으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현종개수실록』 5년 3월 3일).

변천

세종대 병조(兵曹)와 군기감 제조(提調)는 궁장이 당시 27명이지만 13명을 더 늘려 달라고 요청하였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궁장은 국가 기관에 소속되었고, 그 인원은 점차 늘어났다. 문종대에는 내궁방에서 일하는 군기감 소속 양인과 궁장들에게 체아직(遞兒職)을 제수하기도 하였다(『문종실록』 1년 9월 3일). 이들은 각자의 특기에 따라 궁장과 궁정(弓箭), 궁현(弓弦), 철현(鐵弦), 장피(獐皮) 등으로 구분되었다(『세조실록』 13년 5월 29일).

궁장은 부역제에 따라 번(番) 단위로 그 역할을 이행하였다. 즉 궁인(弓人)은 정액(定額)이 15명이었는데 이들을 3번(番)으로 나누어 5명씩 작업하였고, 시인(矢人)은 정액이 30명이었는데 이들도 3번으로 나누어 10명씩 함께 작업하였다. 체아(遞兒) 2명은 부전사(副典事) 1명, 부급사(副給事) 1명으로 하였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참고문헌

  • 『한국민속대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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