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시중(門下侍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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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초기에 문하부(門下府)에 편성된 정1품 관직.

개설

982년(고려 성종 1)에 내의성(內議省)을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개편하면서 처음 설치하였다. 문종 때 종1품 정원 1명으로 정하였다. 1275년(고려 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강요로 첨의중찬으로 격하되었다. 이후 몇 차례 변화를 거듭하다가 공민왕 때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새로 제정된 관제에서는 정1품의 좌·우시중으로 구분되었다. 1394년(태조 3)에는 시중의 명칭이 정승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401년(태종 1)에 문하부가 혁파되면서 문하부의 좌·우정승은 의정부의 좌·우정승이 되었으며, 뒷날 좌의정·우의정으로 개정되었다.

담당 직무

고려시대 전기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중서문하성의 장관으로, 종1품이었다. 그에 따라 수상·총재·상재(上宰)·대재(大宰)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이부(吏部)의 판사 즉 판이부사(判吏部事)를 겸하여, 인사 행정을 포함한 상서이부(尙書吏部)의 업무도 담당하였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이 임명되지 않거나 유고한 경우에는 평장사(平章事)가 임무를 대신 수행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후기에는 정방(政房) 등의 출현으로 인사권이 위축되어, 문하시중이면서 판이부사를 겸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초 문하부의 좌·우시중은 도평의사사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의 직을 겸하여 인사권을 행사하였다. 고려말에도 이성계가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던 만큼(『태조실록』 총서), 수상으로서 국정 운영의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문하시중은 고려시대의 최고 정무 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장관이었다. 1275년에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병합되어 첨의부로 바뀌면서 첨의중찬(僉議中贊)이 되었고, 정원도 1명에서 좌·우 각 1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정원과 명칭이 자주 변경되었는데, 1354년(고려 공민왕 3)에는 도첨의시중으로 바뀌었다가 곧 도첨의정승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문종 때의 관제가 복구될 때 중서문하성이 부활하면서 문하시중으로 불리게 되었다.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는 도첨의부가 만들어지면서 첨의정승으로 불렸으나,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도첨의부가 문하부로 개편됨에 따라 다시 문하시중으로 바뀌었다. 이때 정원은 좌·우 각 1명이었다. 창왕 때는 이전의 좌시중은 문하시중, 우시중은 수시중이라고 불렀다.

조선 건국 이후에 새로 반포된 관제에서는 정1품의 좌·우시중으로 구분되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이때 좌·우시중은 문하부의 판사로서 도평의사사에 참여하였다. 1394년(태조 3)에는 시중의 명칭이 정승으로 변경되었다(『태조실록』 3년 10월 10일). 1400년(정종 2)에 도평의사사가 의정부로 개편된 뒤에는 의정부에 참여하였으며(『정종실록』 2년 4월 6일), 판상서사사의 직을 겸하여 인사권을 행사하였다(『정종실록』 2년 12월 1일). 이후 1401년(태종 1)에 문하부가 혁파되면서 문하부의 좌·우정승은 의정부의 좌·우정승으로 바뀌게 되었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박용운, 『고려시대 중서문하성 재신 연구』, 일지사, 2000.
  • 박용운, 「고려시대의 문하시중에 대한 검토」, 『진단학보』 85, 1998.
  • 정두희, 「조선건국초기 통치체제의 성립과정과 그 역사적 의미」, 『한국사연구』 67, 1989.
  • 한충희, 「조선초기 의정부 연구」(상)(하), 『한국사연구』 31·32, 1980·1981.
  • 한충희, 「조선초기 의정부당상관연구」, 『대구사학』 8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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