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현장(弓絃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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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실 또는 가죽으로 활시위를 만드는 장인(匠人).

개설

조선초기에 분업화되어 대량으로 무기를 제작할 때 있었던 장역(匠役)인데, 경공장(京工匠)으로 일정 기간 존속하였으나 곧 없어졌다.

담당 직무

조선초기 군기감(軍器監)에 소속된 궁현장(弓絃匠)은 활시위를 만들었다. 1459년에 궁현장이 만든 활시위가 좋지 않자 세조는 불량한 활시위를 만드는 장인을 군사를 조련하는 조목에 의거하여 처벌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5년 6월 2일). 활시위는 활과 함께 왕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선물이기도 하여 그 수요가 많았다(『세조실록』 5년 12월 17일). 궁현장은 활시위를 주로 명주실로 제작하지만, 노루 가죽으로 만들기도 하였다(『세조실록』 13년 7월 4일). 각 포(浦)에서 수영에 활시위를 만들 노루 가죽을 공물로 바쳤으므로 이것으로 지방의 궁현장이 활시위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선조실록』 4년 11월 29일).

명주실로 활시위를 만들 경우에는 명주 200근으로 활시위를 6,400개를 만들 수 있었다. 활시위는 중국에서도 수입되었으며 중국에서 온 사신이 매를 잡아 온 사람들에게 중국의 활시위를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함경도감영의 궁현장이 활시위를 만들기는 하였으나 이 지역에서는 누에를 키울 수 없어 명주가 거의 생산되지 않아 활시위가 항상 부족하므로 중앙 정부에서 자주 활시위를 보내주었다.

변천

1434년(세종 16)에 군기감 장인의 인원을 늘릴 때 군기감 소속 궁현장은 2명에서 4명으로 증원되었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세조 때는 군기감에서 궁현장과 관련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된 1485년에는 상의원(尙衣院)에 4명, 군기시(軍器寺)에 6명 등 총 10명의 경공장이 있었다. 이것은 세조 때부터 군대의 주된 무기로 활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궁현장 등의 장인이 이전보다 늘어난 것이다. 명주로 활시위를 만드는 기능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궁현장의 장역이 없어진 이후에는 명주를 생산하는 다른 장인들이 활시위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강만길, 「조선전기의 관장제와 사장」, 『조선시대상공업사연구』, 한길사, 1984.
  • 이혜옥, 「조선전기 수공업체제의 정비」, 『역사와 현실』 33,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