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태(景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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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 명(明)나라의 경제(景帝) 대에 사용한 연호(1450년~1457년).

개설

중국 명나라 제 7대 황제인 경제가 사용한 연호로(1450년~1457년), 경제는 연호인 경태(景泰)를 본 따 경태제(景泰帝) 또는 경태 황제(景泰皇帝)로 불린다.

경제는 <토목(土木)의 변(變)>을 통하여 황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형인 제 6대 황제 영종(寧宗) 대에 명나라는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족의 침입을 받았다. 영종은 이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직접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오히려 포로가 되고 말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토목의 변>으로써, 중국 역사상 황제가 포로로 잡힌 첫 번째 사건이다. 이에 황제의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 없어, 영종의 동생인 경제가 황위에 오르고 연호를 경태로 개원하였던 것이다. 이어 영종은 곧 풀려났으나, 경제는 영종을 태상황제(太上皇帝)의 지위에 올린 후 남궁에 유폐하였고, 영종은 황위를 되찾기 위하여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경제가 병에 걸린 틈을 타서 영종은 경제를 폐위시키고 다시 황위에 올랐으며, 이를 가리켜 <탈문(奪門)의 변(變)>이라 한다. 이렇게 하여 영종은 제 8대 황제가 되었으며, 이어 천순(天順)으로 개원하였다.

한편 조선(朝鮮)에서는 세종(世宗)과 문종(文宗), 단종(端宗), 세조(世祖)가 경태 연호를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31년 9월 29일자 기사에서 이듬해부터 경태 연호를 사용한다며 이 연호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또한 조선은 독자적인 연호 대신 중국 연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연대(年代) 표시를 위하여 이 연호가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경태 계유년’이 『조선왕조실록』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 해는 단종원년(1453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훗날 세조(世祖)가 되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 등의 원로 신하를 처치하고 왕위에 오를 기반을 닦은 해이다. 이러한 이유로 ‘경태 계유년’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세조 때의 공신(功臣)들의 졸기에 주로 등장한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철종실록(哲宗實錄)』
  • 『명사(明史)』
  • 이현종 편, 『동양연표(東洋年表)』, 탐구당,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