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靖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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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 송(宋)나라 흠종(欽宗) 대에 사용한 연호(1126년~1127년).

개설

중국 송나라 흠종 대에 사용한 연호이다(1126년~1127년).

요(遼)나라의 말제(末帝)가 금(金)나라의 아골타(阿骨打) 군대에게 대패하여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송나라는 오대(五代)의 후진(後晉) 시절 요나라에게 빼앗긴 연운(燕雲) 16주를 탈환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휘종(徽宗)은 채경(蔡京)과 동관(童貫) 등의 주장에 따라 금나라와 연합을 하고 거병을 하였으나, 이때 <방랍(方臘)의 난(亂)>이 발생하면서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군대를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요나라 토벌은 금나라 군대가 담당하였고, 송나라 군대는 요나라 잔존 세력을 처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송나라 군대가 이것을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금나라 군대가 다시 투입되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이로써 주변국들은 송나라 군사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런 상황에서 송나라는 연운 16주 탈환의 목적 아래 이번에는 요나라와 함께 금나라를 협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금나라에 발각되면서 정강1년, 즉 1126년 금나라는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휘종은 ‘자신의 죄를 말하는 조칙’을 받아 자아 비판을 한 후 상황(上皇)으로 퇴위하고, 흠종이 다음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면서 흠종은 배상금과 태원(太原)을 포함한 3진 20주 양도, 주전파(主戰派) 파면 및 재상과 친왕 인질이라는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금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다시 주전파들이 대두하였고, 결국 금나라 태종(太宗)은 다시 송나라를 공격하여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황족과 신하 등 3천여 명을 포로로 붙잡아 갔다. 이 사건이 바로 <정강의 변(變)> 혹은 <정강의 화(禍)>로, 송나라 멸망의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휘종의 아들 고종(高宗)이 난징(南京)에서 즉위하여 남송(南宋)을 건국하면서 송나라의 명망을 이어갔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정강 연호는 주로 <정강의 변>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정치적 혼란이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한 예로 정강 연간을 살펴보고 있으며, 이 가운데 정강 연호가 등장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송사(宋史)』
  • 이현종 편, 『동양연표(東洋年表)』, 탐구당,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