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宣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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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 송(宋)나라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대에 사용한 연호(1119년~1125년).

개설

중국 송나라의 제 8대 황제인 휘종 대부터 그의 아들이자 제 9대 황제인 흠종 대까지 사용한 연호이다(1119년~1125년).

휘종은 예술적으로는 매우 뛰어났으나,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다. 자신의 예술 활동을 위하여 국고를 낭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수시로 동원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에 백성들의 불만은 팽만해져갔고, 여기에 불안한 정치 상황들이 겹치면서 결국 송나라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대표적인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는 송나라의 청계(靑溪) 사람인 방랍이 선화(宣和)2년(1120년) 10월에 일으킨 <방랍(方臘)의 난(亂)>을 들 수 있다. 스스로 성공(聖公)이라 칭한 방랍은 휘종의 예술 활동 때문에 20여 년간 화석(花石)을 채취하며 불만에 쌓인 백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방랍은 수개월 사이에 6주(州) 52현(縣)을 격파함으로써 중국의 동남쪽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선무제치사(宣撫制置使)동관(童貫)에게 사로잡히면서 <방랍의 난>은 진압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난에 협력한 백성까지 약 300만 명이 도륙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후 송나라의 국력 역시 급격히 쇠퇴한다. 아울러 요(遼)나라와의 전쟁에서 금(金)나라의 도움을 받았다가, 그 대가로 연운 이북 지역 등을 금나라에게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자 휘종은 요나라와 협공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그 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아들인 흠종에게 황위를 양위하였다. 황위에 오른 흠종이 금나라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기로 하면서 금나라는 퇴각하였으나, 이를 노려 흠종은 다시 강경책을 실시하려 하였다. 이에 금나라는 다시 송나라에 침입하여, 휘종과 흠종 등 3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가는 <선정(宣靖)의 화(禍)>를 일으켰고, 결국 송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여기서 ‘선(宣)’은 휘종의 연호인‘ 선화(宣和)’에서 따온 것이고, ‘정(靖)’은 흠종의 연호인 ‘정강(靖康)’에서 따온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국가의 안위 및 백성들의 역(役) 문제, 혹은 재정 문제 등에 대하여 논의를 할 때에 주로 선화 연간은 인용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이 산적하였기 때문에, <방랍의 난> 등이 발생하여 송나라가 멸망하였음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명종실록(明宗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송사(宋史)』
  • 이현종 편, 『동양연표(東洋年表)』, 탐구당,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