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화(白銅貨)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0:28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1892년(고종 29) 전환국(典圜局)에서 발행한 액면가 2전 5푼의 동전.

개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시 조세금납화의 일환으로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에 따라 은본위제가 시행되고, 1901년(광무 5)에는 「화폐조례(貨幣條例)」에 의해 금본위제가 실시되면서 백동화는 보조화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재정 궁핍으로 본위화폐인 은화는 거의 주조되지 않았고, 보조화폐인 백동화와 적동화가 주로 제조되었다.

연원 및 변천

러일전쟁 중인 1904년 7월 8일 「대한시설세목(對韓施設細目)」 제3항에서 화폐정리에 관한 구체적인 방침이 정해졌고, 같은 날 부임 직전의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게 일본 외무대신은 17개 항목의 ‘내훈(內訓)에 속한 시정 요목’을 제시하였다. 이 중 화폐정리와 관련된 것은 다음의 다섯 개 조항이다.

① 일본 화폐의 유통을 공인하게 할 것.

② 백동화 주조를 정지시키고, 이미 발행된 백동화의 처분은 자세히 연구하여 그 방법을 세울 것.

③ 화폐는 일본에서 주조하고, 한국전환국은 폐쇄하며, 만일 전환국을 유지할 경우에는 일본조폐국의 출장소로 하든지, 아니면 그 감독 아래에 두어 화폐의 신용을 유지할 것.

④ 정부 지폐는 발행하지 말 것.

⑤ 제일은행 발행의 은행권은 당분간 현재대로 하며, 이것을 공약으로 하여 세출로 지불하며, 적당한 정도로 의무를 부담하게 하여 재정에 이용함.

이상을 근거로 그해 10월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고문으로 들어온 메가타는 정부 재정의 문제점으로 화폐제도의 문란, 왕실과 정부 재정의 혼동, 세출의 남발과 징세기관의 문란에 있다고 규정하고, 가장 먼저 화폐정리와 금고(金庫)제도를 추진하였다.

메가타는 같은 해 11월 30일 본위화를 세우지 못하고 보조화만 남발하는 등 재정문란만 야기한다는 명분으로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전환국을 공식적으로 폐쇄케 하고 「화폐정리방침」을 세웠다. 여기에서는 “본위화 및 태환권은 일본 것으로 할 것. 혹은 일본태환권을 준비로 하여 일본 정부가 감독 및 보증하는 은행권으로 할 것. 보조화는 모두 대한제국 정부에서 발행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이는 일본 화폐 혹은 일본 은행인 제일은행권이 한국의 화폐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음 해인 1905년 1월 27일 제일은행으로 하여금 대한제국 정부의 세입·세출과 금고 출납을 담당케 하였다. 동시에 대한제국 정부와 「화폐정리 사무에 관한 계약」, 「화폐정리 자금 차입에 관한 계약」 등을 체결하여 화폐정리에 관한 제반 사항을 제일은행에 일임하였고, 3월 24일 제일은행권을 공식 법화로 보장받도록 하였다.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과 화폐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백동화와 엽전을 신식화폐와 교환하는 화폐정리사업을 제도적으로 추진시켜 나갔다. 1905년 1월 18일 당시 일본의 화폐제도와 동일한 「화폐조례 실시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그해 6월 1일부로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동시에 대한제국의 화폐와 형체와 양목(量目)이 동일한 일본 화폐는 합법적으로 유통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일본 화폐가 조선에 침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일본은 4월 17일부로 새로운 화폐도 전환국 대신 일본 오사카 조폐국에서 발행케 하였다. 이어 한국 정부로 하여금 6월 8일 「신화폐조례의 실시와 구백동화 환수에 관한 건」, 6월 24일 「구백동화교환에 관한 건」, 「구백동화교환 처리순서」 등을 발표케 하였다. 이는 신구 화폐 교환 및 환수에 관한 것인데, 구화폐인 백동화를 회수하고, 서울·평양·인천·진남포·군산 등지에 교환소를 설치하여 1905년 7월 1일부로 교환을 개시하였다. 1905년에는 주로 교환, 1906년에는 납세, 1907년 이후에는 매수에 의해 백동화 환수가 이루어졌다.

이로부터 구백동화와 엽전 대신 일본은행권과 제일은행권이 본위화로 유통될 수 있었다. 또한 보조화로는 반원(半圓) 20·10전, 은화 5전, 백동화 1전, 반전(半錢)의 청동화(靑銅貨) 및 일본 국내의 보조화가 통용되었다. 당시 유통된 화폐 중 제일은행권이 가장 많은 액수를 차지하였다. 이 역시 본위화인 금화와 태환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은행권과 태환되었다.

화폐정리사업은 1905년 7월 1일부터 1911년 2월 말까지 실시되었는데, 각지의 농공은행·금융조합 및 상인들의 교환조합에서 수집을 담당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제일은행과 계약을 맺고, 정리자금으로 300만 원을 빌린 후 다시 이것을 제일은행에 주어 정리 사무를 위촉하였다. 아울러 제일은행이 국고금을 취급함은 물론 은행에서 발행하는 지폐를 공사(公私) 일체의 거래에서 통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에 따라 제일은행은 1909년 11월 한국은행이 설립되어 업무를 인수할 때까지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에서 세운 금융기관은 유명무실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백동화는 품위·무게·형태에 따라 갑·을·병종으로 구분하였다. 이 중 갑종의 백동화만을 신화폐와 교환하고, 을·병종 백동화는 낮은 가격으로 환수하거나 아예 받지 않았다. 엽전도 비싼 교환 가격으로 일반 소유자들과 한국 상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이를 미리 알았던 일본 상인들은 구입한 백동화를 고가에 판매함으로써 큰 이익을 남겼다.

백동화 정리 사업으로 인해 1905년 이후 한국 사회는 금융공황에 직면하였고, 상인들의 도산도 속출하였다. 교환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의 화폐재산을 수탈하였고, 화폐가 부족한 전황(錢慌)을 이용하여 부동산을 매집하는 등 통화·금융 분야에서 점차 조선 경제지배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형태

백동화의 주조 방식으로는 정부로부터 주조 특권을 얻어 주조하는 특주(特鑄), 상납전을 받고 ‘개(啓)’라는 글자가 적힌 특허장을 주어 주조를 묵인하는 묵주(默鑄), 내외국인이 백동화 판형을 몰래 입수하여 위조화폐를 만드는 사주(私鑄) 등이 있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황성신문(皇城新聞)』
  • 『대한제국관보(大韓帝國官報)』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한국화폐정리보고서(韓國貨幣整理報告書)』
  • 『韓國幣制改革ニ關スル情願書』, 京城商業會議所, 1905.
  • 김재순,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화폐금융정책과 조선 상인층의 대응」, 『한국사연구』69, 1990.
  • 오두환, 「한국 개항기의 화폐제도 및 유통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4.
  • 원유한, 「당오전고」, 『역사학보』35·36, 1967.
  • 원유한, 「전환국고」, 『역사학보』37, 196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