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방(進士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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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시 합격자의 명단.

개설

진사방(進士榜)은 사마방목의 일부로 생원방과 함께 수록하였다. ‘진사방에 올랐다.’거나 ‘진사방에서 이름을 빼 버린다.’처럼 진사시 합격의 의미로도 쓰였다.

연원 및 변천

19세기 중반 이후 진사시 합격 인원이 증가하였다. 정원을 초과하여 뽑을 때 1등과 2등은 그대로 하고 초과된 인원의 등급은 3등으로 하였다. 은사(恩賜)로 특혜를 주는 경우에도 방말(榜末)에 기재하였다.

형태

진사방은 진사방목의 의미로 쓰였다. 진사방목은 단독으로 간행하지 않고, 생원방과 함께 묶어 사마방목으로 간행하였다. 사마방목은 권수(卷首)·원방(原榜)·부록으로 구성되었는데 진사방은 합격자의 명단을 과차 순으로 올린 원방에 생원방·진사방의 순서로 수록하였다. 진사방에는 합격자 100명을 1등 5명, 2등 25명, 3등 70명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진사방의 또 다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진사방에 관한 기록은 1438년(세종 20)에 처음 보인다(『세종실록』 20년 2월 11일). 왕이 근정전에 나아가 진사방을 의식대로 발표하였다는 내용으로 이때의 진사방은 방방(放榜)의 의미로 쓰였다.

진사시 복시에 합격하는 것을 말하는 경우에도 쓰였다. 진사시 합격을 ‘진사방에 올랐다.’라고 하며(『광해군일기』 4년 6월 22일), 합격을 취소하는 것을 ‘진사방에서 이름을 빼 버린다.’라고 하였다(『영조실록』 5년 10월 3일).

1790년(정조 14)에 정조는 감시 초시를 마친 후 칠일제(七日製)를 개최하고 시권의 등급을 매긴 후 수석을 한 서울과 팔도의 유학들을 진사방에 직부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4년 8월 7일). 진사방에 직부하였다는 것은 곧 진사시 합격을 의미하였다. 칠일제는 7월 7일에 성균관 유생들의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시행한 시험이었다. 진사시에서 직부는 초시를 거치지 않고 복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것인데, 정조는 칠일제를 거친 유생들에게 진사방 직부라는 특전을 준 것이었다. 서울 수석 최재현(崔在鉉), 경기도 수석 윤영길(尹永吉) 등 9명은 『숭정삼경술증광사마방목(崇禎三庚戌增廣司馬榜目)』에 진사방 3등 88위에서 96위에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진사연구』, 집문당, 1998.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kr/index.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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